도정출입 60년 지난날을 되새긴다 (④)
도정출입 60년 지난날을 되새긴다 (④)
  • 김운성/ 편집국장 kmaeil@
  • 승인 2007.09.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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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단지는 불도저 K서울시장의 특허품도시설계 없이 불도저 들이대면서 인간존중 부재 뭄뚱이만 득실거린 형세저녁 때 계획이 서면 다음날 이른 새벽부터 실행에 옮긴다는 K서울시장이었다. 그는 성남 단지 내에 무수히 깔린 국유지에 重機를 들이대어 구롱농지를 밀어제치며 택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길을 만들고 하수도를 매설한답시고...공사설계 따위는 정지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이루어졌다.토목 건설용 중장비를 투입시킨지 보름 후, 서울로부터 이주민들이 실어 날라지기 시작했다. 파헤쳐진 진흙더미 위로 10만이나 되는 철거민들이 쏟아지듯 퍼부어진 것이었다. “성남단지”로 명명 된 그곳에 ... 정말 성남은 “사람단지”로 불려 질만 했다. 인간의 주거지역이 아닌 인간의 몸뚱이 들이 득시글 거리는 ‘단지’로 성남단지의 기원은 이처럼 서울시의 ‘불도져’같은 압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인구 10만명의 대이동! 그것은 정녕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런 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서울시의 철거민에 대해 성남단지 이주는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당해 년도인 1969년에 10만명이 우선 이주되었으며 그 이듬해 봄, 나머지 5만명에 대한 이주가 완료되었다. 글로 표현하자니 ‘이주’였지 그게 어디 이주였던가! 트럭 가득히 철거민들을 마구잡이로 실어다가 천막촌에 꾸역꾸역 내다버리듯 날라놓고 갔으니, 그것은 분명 ‘이주’가 아닌 추방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성남단지에 대한 행정 역시 갈팡질팡 이었다. 주민등록 및 치안업무는 성남단지의 관할 구역인 경기도가 맡았고, 구호, 취업, 보건후생 등 생활 행정은 서울시가 맡았었다. 이를테면 성남단지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피가 섞인 혼혈아 행정구역이 되고만 격이었다.인구 5만명이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로선 꽤나 큰 지방도시 수준이었다. 헌데 서울시는 그런 성남단지에 ‘출장소’라는 이름의 소위 파견 행정부서를 두고 고작 20명의 직원들을 상주시켰다. 말할 필요조차 없이 5만명의 주민을 상대하기엔 엄청난 태부족이었다. 보건, 후생면에 있어 3~4명의 의사를 배치하고 보건소를 설치했지만 말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을 피나게 뛰어다녀도 극히 일부분에 대한 진료가 고작이었다. 주민들의 생계 또한 막막했다. 하루아침에 생활터전을 잃고 쫓기 듯 실려 온 사람들에게 그 생계대책이 얼마나 막막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이었는데...행상을 하건 노동을 하건 서울에서는 일거리가 있었다. 허나 보이는 것이 온통 허허벌판이요, 벌건 진흙구덩이니 어느 곳에 손을 들이밀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겠는가.구호곡으로 받는 하루 5홉의 양곡으로는 생계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그들을 버린 서울로 하나둘씩 기어오르기 시작 했다. 비록 날품팔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자리는 서울밖에 없었다. 새벽 별을 보고, 늦은 밤의 허허로운 밤공기를 마시며 출퇴근했다. 비포장의 황토길을 오가야 했으며, 이따금씩 이나 있는 서울내왕 버스에 전투를 방불하는 몸싸움 끝에 짐짝처럼 실려야 했다. 상, 하수도 시설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으며, 비만 오면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길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참으로 성남단지의 생활은 전쟁이었다. 살아있다는 저주와 원망만 있을 뿐이었다. 새집을 지어줄 것이며 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주선하여 준다는 서울시의 당초 약속은 시일이 지나며 아무도 믿질 않았다.주민들은 때지어 출장소를 찾아가 대책을 호소하였다. 출장소뿐이랴. 서울시청의 시장실 이나, 부시장 실 앞 복도를 서성이며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렵게나마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시장도 아니요 부시장도 아니요 소관업무를 관장한다는 국장이었다. 하지만 국장이 그들에게 무슨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려줄 수 있었겠는가. 성남단지의 주민들은 이제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이 참담한 생활환경을 개선 시켜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분노가 노도와 같이 폭발하여 터져 오른 것이었다. 경찰차를 불태우고, 소방차량을 탈취하고... 성남단지의 대규모적 시위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기자들은 도지사 방을 찾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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