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출입 60년 지난날을 되새긴다 (⑥)
도정출입 60년 지난날을 되새긴다 (⑥)
  • 김운성 편집국장 kmaeil@
  • 승인 2007.09.0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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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이 추천한 경기지사라서 고분고분하지요.N지사 기자 닥달에 붉으락 푸르락 펄펄 뛰었지만서울로 직행 K시장과 담판 지어 행정권 인수“우리가 듣기로는 N지사께서 서울시 부시장으로 재직한 재작년까지 불도져 같이 모든 공사를 밀어붙인 K서울시장의 뒷바라지를 잘하였기 때문에 공로가 인정되어 K서울시장 청와대에 추천하여 벼락치기로 경기도지사에 낙첨 됐다는 말이 무성합니다. 함으로 K서울시장은 N지사는 내 사람이니 구질구질한 서울 영세민들을 성남시에 쓸어다 부어도 받을 것이다.” 기자들의 농쪼를 튕기자 N지사는 펄쩍 뛰며 기자들의 말을 막았었다.그는 완강하게 기자들의 말을 부인했었다.어찌 되었건 이런 실랑이가 있은지 7일 후 서울시는 성남단지에서 손을 떼고 경기도는 성남단지에 출장소를 개설하였으며, 이는 장차있을 성남市로의 승격에 일차 기반이 되었었다.온갖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어 나가던 성남단지가 市로 승격된 것은 1972년이었다. 빈민 집단과도 같았던 ‘단지’라는 허울을 벗어버리고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市 승격이후 상당 기간 동안 성남시는 “市”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크고 작은 불상상가 터져 나왔다. 작게는 촌락에서부터 크게는 도시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이면 어는 곳에건 전통의 역사가 있다. 형성 기원으로 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살다간 사람들의 생활과 자취가 점철 된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역사가 바탕이 되어 모든 사회와 문화와 인간, 삶을 살찌우는 것이다. 그러나 성남시는 그러하질 못했다. 급조된 도시였기에 있다면 급증한 인구와 허허로운 주변 환경 뿐 이었다. 그래서 성남시에는 생성 초기 소위 5大不毛가 있었다.역사의 불모, 문학의 불모, 애행심의 불모, 교육의 불모, 생산의 불모, 성남 市의 초대 시장이었던 L씨의 노심초사했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성남단지가 市로 승격될 때 초대 시장으로 당시의 경기도 기획관리실장이던 C씨와 내무국장인 L씨가 하마평에 올랐었다.C실장은 울산시장 경력이 있어 행정수완이 월등하여 도처에 문제가 산재하여 있는 성남市의 시장으로서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의 박력 있는 추진력은 때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어 소요사건 이후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성남시의 주민들을 다시금 자극할 염려가 있었다. 한편 L국장은 C실장에 비해 도시행정 경력은 적은 편이었으나, 그의 온후한 성격이 남다른 강점이었다. 결국 성남시의 초대 시장으로는 L국장이 발탁되었다. “고생길이 훤하게 트였습니다.”농담 삼아 시장으로 승진된 L씨에게 기자들이 던진 축하 인사였다. L씨는 이에 대해 “십자가를 메고가는 심정”이라고 되받았었다.과연 기자들의 승진 축하 인사처럼 L시장에게는 부임초에 큰 수난이 닥쳤으니 그 첫 번째 시련이 부임한지 보름 만에 발생되었다. 그해 초여름 어느날.유난스런 무더위가 몇일 계속되더니 초저녁부터 거센 비가 쏟아졌다. 가뭄이 길었던 때인지라 말하자면 단비였다. 허나 農家에는 더할 나위 없었을 그 단비에 성남시로서는 엄청난 수해를 입고 말았다. 다음날 오전, 도정 기자실은 특종감이나 얻었다는 듯 성남시로 달려갔던바 언제 그러했느냐 싶게 하늘은 따가운 햇살로 가득했는데 정작 성남시는 수마에 할퀴어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2명의 실종자가 발생되었으며 도처에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은 수재민들 투성 이었다. 천변뚝을 따라 펼쳐진 아비규환은 그야말로 인간의 사는 곳이 아니었다. 흙더미에 깔려 중상을 입은사람, 악몽과도 같은 지난밤의 충격 속에서 그제껏 깨어나지 못한양 실성한 듯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 진흑탕 물에 뒤범벅이 된 흉측한 몰골로 천막 속에 누워있는 사람... 정말 성남시는 아수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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