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순환, 헌혈
생명의 순환, 헌혈
  • 시화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김영철 과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17.04.13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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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액이 무엇인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안다. 넘어져 피가 나면 아파서라기보다는 피를 보고 놀라서 우는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몸을 돌고 도는 피는 나를 이루는 한 성분으로 밖으로 내비치기만 해도 두려운 물질인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피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타인의 피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혈액이 혈관을 빠져나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누구든 좋은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혈액이 생명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일전에 어떤 산모가 분만을 하고 나서 수혈이 늦어져 사망한 사건을 기사에서 접한 적이 있다. 당시 분만을 담당했던 병원은 규모가 작아 병원 내에 보유하고 있는 혈액이 없었고, 만일을 위해 혈액을 주문해서 반출을 하였다가 해당 산모에게 수혈을 하지 못하면 그 혈액은 폐기가 된다는 이유로 수혈 준비를 미리 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산모측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 경우 병원에서 수혈해야 할 상황이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혈액을 준비했어야 하는 것일까? 그 소송의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필자는 늘 혈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할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미리 수혈준비를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좀 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사망한 환자측에서 보면 폐기처리 될 우려가 있더라도 혈액을 미리 준비 해놓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 주장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일단 제공할 혈액이 존재해야 이런 다툼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산모에게 수혈해줄 혈액이 그 어디에도 없다면, 우리는 혈액이 필요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 누구를 탓할 필요 없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남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병원에서 수혈이 늦어져 사망한 사건을 보면 안타깝게 생각하며 누군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전혀 모르는 남을 위해 헌혈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우리 사회가 자신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도덕적 의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3자로서 방관자로서만 존재하고, 한편으로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자를 탓할 수 있는 권한만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상당수에게 기회가 없었을 뿐 타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에 언제든지 동참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영웅이 아니어도, 목숨을 걸지 않아도 할 수 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혈액을 사회에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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