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의 기자수첩]‘이태백’들이 ‘이태백’의 풍류를 즐기는 그 날을 꿈꾸며
[윤성민의 기자수첩]‘이태백’들이 ‘이태백’의 풍류를 즐기는 그 날을 꿈꾸며
  • 윤성민 기자 yyssm@naver.com
  • 승인 2017.09.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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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독작을 통해 우리에게 큰 감명을 준 이태백. 두보와 더불어 한시 문학의 양대 거성으로 추앙받던 이태백은 더 이상 없다.

풍류를 아는 천재 시인이자 시선(詩仙)으로서 한시를 즐기던 이태백은 이제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아픈 청년들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올 8월 기준 실업률은 9.4%로 1999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취준생과 비정규직노동자, 시간제근로자까지 포함한 사실상의 청년 체감 실업률은 전체 청년의 20%가 넘는다.
이태백의 풍류가 아니다. '억지로' 풍류를 즐기고 있는 이태백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이 시대 청년들의 미래를 살펴 보자. 실업을 통해 그들이 한 평생 겪게 될 비극은 불 보듯 뻔하다. 막대한 학자금대출을 등에 업고 사회에 첫 발을 디딘 것도 모자라, 번듯한 직장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 차라리 알바로 입에 풀 칠만 하며 수 년 째 부모의 배에 얹혀사는 캥거루족들은 점점 자립 의지를 잃어만 간다.

혹자는 작금의 청년실업문제를 정부의 정책에서 찾으려 애쓴다. 세계적인 경제석학인 미국의 키들랜드 교수 또한 "제대로 된 경기부양을 위해선 일관되고 장기적인 안목의 정부 정책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물론 거시적 관점에서의 청년실업 해소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정부의 정책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아무리 멋진 피라미드도 하나의 변이 세워지지 않으면 멋지게 서 있을 수 없듯, 청년과 정부 그리고 기업이 함께 멋진 피라미드를 세워야 한다.

먼저 우리 청년들은 눈높이를 조금 낮춰야 한다. 모두가 대기업을 부르짖고, 모두가 공무원만을 바라는 사회는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 대기업과 공무원이 나라의 엔진이라면 중소기업은 연료이고 엔진오일이다. 엔진만 있는 자동차는 출발할 수 없듯 중소기업의 노동시장에까지 눈을 낮추는 자세가 우리네 청년들에게 요구된다.

또, 청년들의 암울한 현재는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정책과 비전을 요구한다.
최근 경기도에서 주관한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에 3만 7천명 이상이 몰렸다. 9.4대 1의 경쟁률이었다.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은 기존 청년 취업지원책과는 달리, 청년들이 일자리를 유지할 경우 목돈을 지원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경기도형 청년 지원정책의 일환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일하고 있는 청년들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도에서 마련한 이 같은 지원책을 등에 업는다면,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은 중소기업 등에서도 3년 후 대기업과 맞먹는 목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니 청년실업 해소에도 일정 부분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이 늘어야 한다. 선별적 복지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으나, 계속된 선별은 결국 모두를 택하게 된다.

중소기업 일자리의 질을 올리는 것도 함께 요구된다. 무작정 청년들의 눈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진정 그들이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싶도록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정부와 기업에서 함께 경주해야 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중소기업 스스로의 체질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보통의 대기업과 공무원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한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어떤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기는커녕, 자신들을 ‘노예’, ‘노비’에 비유한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이유는 결국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기본적 욕구에서 기인한다. 그들이 바라는 양질의 일자리는 높은 급여와 칼퇴근 따위로 정리하긴 어렵다. 청년들이 원하는 작은 조건은 그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수준의 ‘상식적인’ 급여와 근로시간 보장, 환경 개선 등 우리의 상식 범위 내다.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 청년이 함께 팔을 걷어 부칠 때다. 이 셋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국가라는 이름의 자동차는 결국 가파른 고용절벽이라는 비극을 향해 내달리게 될 것이다.

이십대 태반이 백수인 작금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 아래서 풍류를 즐기는 이태백으로 거듭날 청년들의 미래를 오늘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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