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최종 책임자는 국민이다
5·18의 최종 책임자는 국민이다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0.05.1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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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끓는 피! 많은 국민들이 익히 알고 있는 민중가요 가사의 일부분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벌어진 유혈사태는 광주지역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이었다.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퇴진과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원성이었다.

1979년부터 시작된 군부독재의 흔들림은 부마항쟁에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살해로 일단락되었고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과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국권을 강탈한 사건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4월 필자가 고교시절 재학 중이던 강원도 태백에서는 사북사태가 발생, 어수선한 그림자는 이미 정국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 흑백 텔레비전 화면에는 연일 대학가의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고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절 전라도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은 신문 ·방송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5월 18일 0시 5분경 광주지역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사전에 검거되고 1시 경 공수부대와 각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국민을 지켜달라고 세금 거둬 사준 총으로 국민에게 겨눈 것이다.

오후 1시부터 군인들이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 아비규환의 처참한 전경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렇게 시작된 학살은 시민군을 형성하게 되는 동기가 됐다.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지 10일, 힘으로 확보한 권력은 재야인사들과 걸리적 거리는 존재를 청소하는 출발이었다.

임기 중인 최 대통령은 핫바지나 다름없었으며 형식적인 통일주체 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시작된 군인 출신 대통령의 행보는 이듬해 삼청교육대라는 살벌한 군기잡기 과정을 만들어 덤빌만한 잔재들까지 범죄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아가리를 닥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보상이나 해명이 없는 게 현실이다. 1981년 당시 필자가 태백 기계공고 1학년 재학 중일 때 학급별로 몇 명씩 추려 운 좋으면 안 가고 재수 없으면 교련수업대신 잠시 다녀오는 유격대 훈련 정도로 알았다.

세월이 지난 1995년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 공소권이 없다고 불기소 처분했고 1996년 항소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5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정작 숙제를 해결해야할 김대중 정권은 1997년 특별 사면으로 석방시켰다. 누굴 믿을까.

1950년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생긴 상처치고는 너무나 잔혹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 혼란에 빠져 반미적인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군인들의 진압행위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동상철거니 친필현판 철거니 요란을 떤다.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최종책임자는 전두환이 아니라 정권 마음대로 해도 구경만 해온 국민이고 그렇게 여론을 조장해 온 언론이며 대충 넘겨준 검찰이다.

당시 목숨 걸고 보좌했다가 의리의 대명사로 알려진 장 모씨, 허 모씨, 이름만대면 알만한 인사들이 지금도 떵떵거리며 호사를 누리고 있는 현실을 뭐라 해석할 수 있을까.

대통령 재임시절 민족의 태양보다 더 칭찬일색으로 떠 받들던 언론보도와 방송은 오욕의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천 억 대의 추징금 거부는 물론 90세가 되어 골프장을 다닐 만큼 만수무강하신 전두환, 지금도 철통같은 자택주변의 경찰 경호의 풍경이 저절로 유지될까. 부역자들이 있는 것이다.

공생의 배를 탔거나 이래저래 대추나무 연 걸리듯 엮인 이해관계자들의 협조와 묵인내지 동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애써 외면해주며 각하께서 오래 사시고 염려마시라고 눈도장 찍어가며 개·돼지처럼 쉽게 잊어버리는 국민들은 무시하셔도 된다는 아부의 결과치인 것이다.

40년 동안 뭐하다가 지금 와서 철거니 삭제니 훈장회수니 식상한 이슈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인지 지나는 개도 웃을 일이다. 이러다 오늘만 지나면 다시 50주기 될 때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까맣게 잊었다가 관이라도 꺼내 부관참시라도 할 것인가.

주권과 인권과 꿈과 희망까지 마음껏 유린하고 휘두르던 행각은 전두환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지금껏 유지된 것 또한 전두환 한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다못해 도둑질도 훔치는 자나 망보는 자, 훔친 물건을 싸게 사주는 장물아비까지 모두 공범이듯 부역자들의 자손과 뿌리까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는 한 동상철거 같은 쑈는 40주년이라는 숫자에 맞춘 국민달래기에 불과한 것이다.

더 이상 묻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부정된 역사를 지우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부정도 긍정도 모두 역사다.

단죄의 이유와 평가의 목적물을 누구 마음대로 어떤 특정 단체의 반대로 철거하는지 국민에게 한마디라도 물어봤는가.

모두 국민세금으로 만든 것이며 당시 언론에는 온갖 미사여구로 홍보하며 홍보예산을 챙겼을 것이고 제막식에 영광스런 테이프 절단사진을 자랑스럽게 가보마냥 내걸었을 것이다.

제대로 단죄할 준비가 아니라면 차라리 국민들이 각자 알아서 평가하게 보존하는 것이 더 큰 벌이 되는 것이다.

비평의 증거를 역사에서 삭제 해주는 은혜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국민들의 무관심이 가져온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국민들이 깨어나지 않는 한 같은 일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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