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던진 정창옥 씨 마녀사냥감
신발 던진 정창옥 씨 마녀사냥감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0.07.23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지난 16일 오후 3시 19분께 국회의사당 본관 2층 현관 앞에서 제21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신발을 벗어 던진 혐의로 구속 위기에 몰렸다가 풀려난 남북함께 국민연합 공동대표 정창옥 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돌발행동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 보니 6을 9로 읽는 사람과 9를 6으로 해석하는 사람과의 견해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정씨의 개인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은 천차만별이었다. 평소 문재인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측과 어디 감히 임금의 행차에 초를 치느냐는 충신들의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독박을 쓴 건 경호관계자들이다. 뒤늦게 정씨가 자유퍼포먼스니 레드카펫을 향했느니 이견을 보였지만 대통령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 점에서는 어느 각도로 보나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국민들에게 거리감을 줄이려는 의지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사건 발생이후 구속영장발부에 대해서도 관심은 더 높아졌다.

표현의 자유가 구속되느냐 대통령에 대한 테러 위협의 여지가 묵살되느냐는 기준점에서 결론적으로 영장이 기각되자 많은 이들이 판사의 판결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어떤 뉴스가 나오든 댓글의 등장에 대한 표현과 속도다. 마치 엄청난 댓글 부대가 대기 중이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쏟아지듯 해당 뉴스에 댓글이 달린다. 속도도 그렇지만 색깔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아직 SNS에 익숙지 못한 네티즌들의 인식에 댓글은 마치 전체적인 의사표현 인냥 각인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몇 시간 만 같은 뉴스를 검색하다보면 금 새 알 수 있는 것이 댓글에 대한 신뢰다.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성향의 글들이 닉네임만 바뀐 채 전에 달린 댓글을 누르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러니 독자들의 판단은 더욱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씨의 뉴스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영웅 어쩌니 하다가 특정 시간이 지나면 온갖 저질 욕설이 한꺼번에 달린다.

하지만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이를 주장하거나 수사에 착수하려는 용감한 한량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이제 SNS의 한계점도 점차 바닥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쯤하고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정씨를 상대로 실명거론은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본 것 이상으로 쏟아내는 언론의 태도는 공포의 분위기다.

누구든 이러한 마녀사냥에 걸리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옳고 그름과 사실여부를 떠나 일단 소나기처럼 쏟아냈다가 아니면 말고 식이다.

필자가 정씨와 직접 대화하고 함께 소정의 업무를 추진했던 날들이 적어도 10년은 넘지만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게 정씨의 성향이다.

돈키호테 같은 엉뚱한 면과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소신이 적절히 섞여있지만 싫고 좋고 가 정확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15년 전 경기도 안산시의 중심상가인 중앙동에 호객행위가 판을 치던 시절, 삐끼 근절에 앞장섰다가 특정인으로부터 시비가 걸려 되려 가해자로 몰렸던 사건이 있었다.

바보스러울 만큼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섰다가 자신만 독박 쓰고도 아무 일 없는 듯 미소가 만연했던 사람이었다.

세월호 추모공원 건립에 대해서도 시민단체를 결성했다가 세간의 비난을 샀다. 실제 내용에 대한 파악이 이뤄지기도 전에 유가족의 아픔에 반대하는 파렴치한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여고생 성폭행이라는 자극적 제목만 있어도 꼼짝없이 인간쓰레기로 몰리게 되는 타이틀이 이번 구두투척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남음이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씨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꼴통 보수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실 확인과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기사를 썼는지, 비난의 댓글을 달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성경의 요한복음에 누구든 죄 없는 자 돌로 치라했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성추문으로 곤욕을 치를 때 과연 이를 성토하는 자들은 털어서 먼지 안 날까.

대한민국에서 기혼자가 한번이라도 외도한 남녀를 총살시키면 얼마나 살아남을까. 말에 대한 격언이나 사자성어가 많은 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은 것을 본 것보다 더 적나라하게 전하는 것이나 듣지 않은 것을 들은 것보다 더 리얼하게 말하는 것, 특정인에게 전해도 죄일진대 불특정 다수의 청취자와 시청자와 독자에게 매체를 통해 체계적으로 무책임하게 전하는 것은 어떤 경우로도 회복 불가능한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듣거나 본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인식은 몇 배의 덧씌우기를 해도 복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씨를 십 수 년 동안 누구보다 잘 아는 필자도 함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인격과 철학과 고유의 가치다.

뭘 안다고 갈기갈기 찢어서 해석하고 인터넷에 올라간 타이틀 따와서 곱씹는 행태는 듣는 국민이나 전하는 언론이나 심사숙고해야할 문제다. 혹시 아는가 정씨의 입장이 어느 누구든 해당될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정씨는 공익을 도모하고 사회가 외면한 청소년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옳고 그른데 대한 객기와 용기가 적절히 융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대한민국의 국민과 정치인이 정씨의 정의감에 절반만 실천해도 이런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균식
김균식 다른기사 보기
kyunsik@daum.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