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없는 날, 기림의 날, 그리고 광복절 연휴
택배 없는 날, 기림의 날, 그리고 광복절 연휴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0.08.1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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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오늘은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 시행되는 ‘택배 없는 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문밖 출입을 자제하게 되었고 웬만한 물품구매는 홈쇼핑이나 인터넷구매를 통해 문전택배로 이어졌다.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단지 내 문 앞에 놓인 택배물품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오래 전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편배달부가 어렵사리 우편물을 배달하는 과정에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고 날아든 화살이 우편물 가방을 뚫어 편지가 찢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어찌하든 우편물을 기다리는 고객을 위해 사명감으로 사지를 통과한 배달부는 가까스로 편지를 전달했으나 이를 받아든 고객의 입에서는 “요즘 우편배달부는 편지하나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서 찢어진 채로 가져온다니까” 과정도 모른 채 전달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무더운 여름날이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마스크를 쓴 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택배기사의 근무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건물밖에 세워둔 택배차량은 언제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받게 될지도 모르고 부재중일 때 분실타령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사회적 인식은 자식 같은 고객에게도 민원의 소지가 두려워 심부름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어쨌거나 오늘 만큼이라도 대신 쇼핑배달을 해주는 택배기사님들의 고마움에 시원한 음료수는 못 건네더라도 수고하셨다는 말 한마디는 어떨까싶다.

또 하나 오늘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기림의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오늘은 故 김학순 할머니께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날이다. 2017년 1월 14일, 유엔인권이사회 UPR은 일본에 대해 성의 있는 사죄와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권고했고 그해 12월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어 공적법적인 국가기념일로 확정이 됐다.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 전일이 기림의 날인 것은 더 의미가 깊다. 나라를 다시 찾았으나 이미 기득권을 선점한 매국노들에 의해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렇게 묻혀 왔다. 어린 여자로 낯선 타국에서 군인들에게 시달려야 했을 암울한 날들은 삶 자체가 트라우마의 연속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민족의 외침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몽골에 밉보여 수 십 만명의 여자들을 해마다 공출 보내야 했던 무능한 나라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병자호란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들은 덕분에 멀쩡히 남아 있게 된 여자들이 자신의 남편들을 관리하려고 환향년이라는 명칭으로 비난의 대상을 만들었다.

한번씩 침략을 당할 때마다 몸을 유린당한 여자들이 목을 매는 풍경이 잦아들던 시절,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들이던 못난 남정네들이 우리의 과거였다. 무능한 남자들이 조정에서 말만 많은 채 자신의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였다.

전쟁터에 끌려가 하루에도 수 십 명씩 덤벼드는 군인들을 감내해야 했던 위안부의 아픈 과거는 우리 모두의 생채기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그렇게 어렵사리 되찾은 나라임에도 광복절 태극기 게양조차 귀찮아한다.

필자가 자비를 들여 해마다 광복절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많은 출연진들이 재능기부를 해주었고 어쩌다 무대에 오르려는 정치인은 아예 사절한 바 있다.

준비하는 과정에 한결 같이 외면하고 무시하다 막상 인파들이 모이면 얼굴도장 찍으려는 가증스러움에 객석은 줄지언정 생색내기의 들러리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3개 국경일을 치르면서 적게는 수 백명, 천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해준 국경일 행사는 이제 집회금지와 코로나19로 인해 옛일이 됐다.

그나마라도 해 봤으니 더없는 추억과 귀한 과거로 남겠지만 우리 국민이 국가의 기념일을 외면하고 연휴로만 여긴다면 후손들이 뭘 보고 배울까.

기성세대가 잘해도 자기중심의 사회적 풍토로 인해 다음세대가 따라할까 말까일진대 이러고도 다시 위안부로 끌려가는 참상이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국제사회의 흐름은 강대국 중심의 판짜기에 언제든 같은 아픔이 반복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비극이 예고되었거나 원해서 겪은 적은 없다. 설마 하는 평화 속에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이었다.

백성들이 처참하게 당할 때 조정에서는 편이 갈려 서로의 주장을 외치느라 정쟁이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수 백년이 지난 현재도 정치판은 민초들의 아픔을 해결하기보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당위성을 외치느라 바쁘다.

걸핏하면 조사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여론지지율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동질과 짜여진 프레임에 화젯거리를 몰고 다니는 언론의 장단에 똥인지 된장인지 구본도 못하는 불쌍한 백성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위안부 모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한 동기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이나 일본군인보다 더 악랄한 짓이며 이렇다 할 해명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나 또 묵인하는 세력이나 모두가 한 패에 불과하다.

과거도 잊고 현재도 버리니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렇게 당하고도 잊는 냄비근성이 문제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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