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응징의 차이
관용과 응징의 차이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0.11.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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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석가모니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가득하다면 진정 행복한 지상낙원이 될까.

불행히도 인간의 내면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며 이기적인 동물적 약육강식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기에 문명의 발전이 거듭된 것이다.

자연을 존중했다면 현대인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모든 과학적 발전은 없었을 것이고 보다 더 자극적이고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 하나를 얻으면 둘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두 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청소부가 실직되겠지만 너도나도 다 버리면 안 되기에 관련 법규를 정하여 규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필요악 이란 게 있는데 모두가 법대로 산다면 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못 뚫는 게 없는 창과 못 막는 게 없는 방패가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적절한 부패는 치어를 살리는 플랑크톤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많은 법이다.

빌린 돈이나 물리적 피해를 준 것은 자신이 알 수 있으나 내가 뱉은 한마디가 돌고 돌아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것이고 반대로 피해자가 된다면 복수와 응징의 칼을 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열 받는다고 다 보복하고 감정 나는 대로 속풀이를 한다면 아마도 세상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아비규환이 될 것일진대 다행히 피폐해져 가는 영혼을 위로하며 상대를 용서하게 하는 종교나 사회정의를 주도하는 언론과 적절한 규제의 칼을 들고 있는 사법부가 있기에 조절이 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으로 시작해 인내와 복수로 이어지는 건 오늘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 유엔 창설 50주년, 유네스코 헌장 채택 50주년을 맞이하여 1995년 11월 16일 제28차 총회에서 제정된 ‘관용의 날’이기 때문이다.

별 날도 다 있다 싶을 것이고 이것도 건수라고 칼럼의 소재로 삼는가 싶겠지만 조금만 깊이 파보면 그 나름대로 유래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관용의 원칙에 관한 선언에는 다른 이의 인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적극적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무관용의 범위와 관용을 베푸는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 기본이 안 되어 있고 끝없는 이기적 요구를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묵인한다면 개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며 최종 재앙의 방관자 내지는 공범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지금까지 준수해온 취재 대상이나 기준점을 보면 사람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 것까지 파헤쳐 쓴다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기삿거리가 될까 봐 넘어가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선이면 그 어떤 금권도 안 통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가 제 기능을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마음 같아선 죄다 형님 누님 하며 대인관계의 터미널이 되고 싶지만 표현의 자유를 얻는 대신 개인의 행복이나 인간관계를 포기한 언론인으로 남아 독야청청 청승을 떨고 있어야 한다.

관용의 반대말은 응징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살다보면 몇 번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일을 겪기도 하고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돌려 줄 거라는 복수의 칼을 갈기도 한다.
응징의 대소는 어느 상황에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자칫 자의적 판단오류로 인한 오해로

점철된 자신을 뒤늦게 돌아보기도 한다. 앞서 어필하듯 마냥 관용은 배려를 권리로 아는 착각의 계기가 되겠지만 응징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

업무적으로 남의 일에 간섭해야 하고 나름대로 사실 확인을 거쳐 보도하지만 상대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대응해야 자신이 살 수 있거나 자신의 허물을 남에게 전달해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렀는지 셀 수 없다.

필자뿐만 아니라 집에서 학교로 집에서 직장으로 조용히 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휘저으며 돌아다녀야 하는 환경이라면 누구나 인간관계에서 고뇌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멀쩡히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굳이 권한다면 미움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자가 더 괴롭다는 말이 있다.

분노의 감정은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부정적 견해를 넓혀갈 뿐만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다 보니 다가오는 미래에 집중력을 저하하는 삼중고를 가져온다. 여명을 친구삼아 대한민국 심장부를 들락거린 지 달포가 지났다.

국민의 뜻을 전하고 반듯한 국가를 만드는 자칭 일꾼들에게 친절한 돋보기가 되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사람이 그래선 안 되는 부분에 대해 응징내지는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하여 건강한 국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요량이다.

살다보면 입안의 혀도 무는 법이다. 본사가 법원·검찰청 앞이다 보니 업무적으로 법정을 자주 들락거린다.

별 사소한일도 소송을 걸고 소송당한 자는 분노에 또 다른 자에게 소송을 하는 고소·고발의 도미노현상이 심각하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철저히 이기적으로 법대로 하는 세상이 되었던가. 반대로 베푸는 관용이 도미노처럼 확산될 순 없을까.

엊그제 ‘친절의 날’이었다. 웃으며 용서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과 사회가 훈훈한 분위기라면 그깟 돈 좀 없으면 어떻고 코로나19 같은 질병도 그리 두려울 건 없을 것이다. 뭐하나 터지면 상황에 따라 한 놈 병신 만드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관용의 실천은 사회의 불의를 용인한다든지 자기의 확신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확신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그들의 확신을 지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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