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 두 신문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
족벌 두 신문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1.04 09: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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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새해 첫 덕암 칼럼의 소재를 찾던 중 만난 한 편의 영화제목이다. 마치 가려움을 참고 견디다 효자손을 발견한 마음이라면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일반 국민들에게 백번 강조 해봐도 그 많은 흥밋거리 속에 전해질리 만무고 정론의 깊이를 더했다가는 언제 풍비박산 날지 모르는 영세한 언론사 대표로서 평소 하고 싶었던 표현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필했던 묵은 체증이 한순간 해소되는 영화였다.

물론 ‘족벌 두 신문 이야기’를 겁 없이 영화화한 뉴스타파도 대단하지만 한번씩 진국을 우려낸 표현의 자유들이 자유 그자체로 국한되는 경우가 그동안 걸어온 진실의 발자국이었다. 2020년 12월 31일 개봉된 영화는 순식간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불과 3일 만에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내레이션을 줄줄 외는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왜일까. 재미는 물론 새삼스런 감동이나 전반적인 구성 자체에 기억될만한 내용도 없으면서 갈증에 물을 마시듯 관심이 모아지는 걸까.

필자의 추측에는 영화를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보면서 이제는 깨어있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 내용대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스스로 권력이 된 그들이므로 모든 역사를 뒤집어야 한다는 대목은 제작진의 의도를 벗어나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받쳐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것이라 미뤄 짐작된다.

시작부터 두 언론사의 친일 여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국회청문회에서 반복했던 증인들의 신문 상황을 재현해 보였다. 누가 봐도 아는 일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양대 신문 언론사 대표들의 발언을 거듭 재현했다.

권력에 의존하여 군부독재를 미화하고 같은 동종 매체들이 현대판 분서갱유를 당하는 대신 호황을 누린 과정도 여과 없이 재생됐다.

언론의 자유를 외치며 입바른 소리하던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 나고 정·관계 및 재벌을 인맥과 혼맥으로 이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는 물론 한국사회에서 실질적인 기득권의 중심에서 대통령의 언론개혁의지까지 연일 비판기사로 맞대응했지만 이에 대해 말려주거나 아니라고 판단을 해줄 그 누구도 없었다.

최종적으로 언론 고유의 기능과 역할에 반하는 특정 종교단체와의 광고와 기사와 홍보를 구분하지 못하고 게재하는 기사성 광고의 통계까지 모두 공개됐다.

앞서 어필한 영화 내용은 뉴스타파의 용기 있는 제작의도와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전을 펼쳐도 사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해 친일과 편파보도를 지적했다면 나머지 100여개의 가까운 매체들은 모두 정론직필을 펼치는 정의의 언론사들일까. “권력이 언론의 자유와 직결된다면 이제는 경제가 대역한다”는 대사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A 방송사는 B 단체의 건물을 수십 년째 통째로 빌려 쓰고도 모자라 아예 통째로 삼키려는 일도 있었고 C 매체는 D 사에 수십 종목의 사업을 벌려 한국경제의 기둥이 되기도 했으니 언론이 독립에 대해 자유로울 매체가 얼마나 될지는 재어 봄직하다.

뉴스타파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면 침묵은 묵시적 동조라 했다. 고양이가 방울 단 쥐를 잡도록 방치하면 다음부터 같은 쥐가 다시 나올 것이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하나씩 풀어보면 하나의 방울이 두 개 열 개 백 개가 될 때 그땐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에티오피아 공화국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침묵이 빚어낸 결과이며 특정 정치인이나 종교단체나 언론매체의 지적만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절대 불가능하다.

한 번의 울림으로서 그칠 일이라면 동학혁명처럼 낫 대신 펜을 들고 의연히 아닌 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강한 의지의 언민들이 함께 동참해야 한다.

영원한 비밀은 없고 권불십년이면 언불백년이다. 양대 신문이 강조한 창간 100년에 변화가 필요한 때가 오고 있다는 조명탄이다. 밖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을 내부에서 침묵한다면 이 또한 외손뼉이나 마찬가지다.

‘상 탁수 하 부정’이라했던가. 윗물이 이러니 광역이나 지방자치단체로 갈수록 돈으로 언론을 길들이는 행태가 당연한 것처럼 자리 잡았고 소위 알아서 기는 수백 개의 지방언론과 수 천 개의 지역신문들이 대동소이한 환경 속에서 자생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전문지나 개인미디어를 제외한 관공서에 출입통보를 하고 기자로 명함 들고 다니는 인원이 약 8천 명에 이른다.

선출직 공무원인 입법기관원이나 난이도 높은 시험을 치른 행정부 공직자와 사법부 공직자와는 달리 특별한 검증 없이 어느 날 기자가 되어 행세하다 보니 일부 자질부족의 기자들이 보도자료에 의존하며 전체를 기레기로 몰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까. 언론이 살아야 입법·사법·행정이 청렴하게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지언데 이제는 국민들도 충분히 자각할 때가 됐다. 누굴 탓할까.

제아무리 조선·동아라 하더라도 전 국민이 외면하면 존재감이 없을텐데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독자수와 발행부수를 지키고 있는 메이저 언론이 아니던가.

대안이 있다. 중소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민이 지켜주어야 한다. 특정 매체가 아니라 모든 지방·지역 신문의 주주가 되어 함께 구독하고 제보하고 필요한 광고도 요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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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2021-01-07 19:09:1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역언론이 토착세력이나 권력과 규합하지 않고 정론직필하는 시대가 열렸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