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어둠의 자식들 누가 아이를 낳을까
[덕암 칼럼] 어둠의 자식들 누가 아이를 낳을까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2.16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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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아동학대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연 친자식이 맞을까 싶을 만큼 이해되지 않는 범행의 과정이 잔인하다. 동물도 새끼에 대한 보호본능은 무서울 만큼 강한 데 어째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기 자식이든 입양한 남의 자식이든 화풀이 대상 정도로 전락했을까싶다.

부모가 이 정도니 일시적으로 육아를 맡은 어린이집에서 벌어지는 학대는 들춰지지 않았을 뿐이지 처음부터 발생 가능성이 높았던 부분이다. 물론 전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 집안일 해가면서도 7남매를 키우던 1960년대 어머니 세대와는 판이한 현실이다.

지금처럼 종이 기저귀나 소젖을 말린 분유가 없었던 시절, 냇가나 우물터에 똥 기저귀 빨며 모유를 먹여 키우던 험난한(?) 과정이 있었으니 당시만 해도 어렵지만 자식 사랑이 목숨보다 더 컸던 시절이었다.

최근 경제적 불황과 질병이 겹쳐지면서 먹고살기 팍팍해지자 애꿎은 아이들만 어둠으로 밀려나고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식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쳐 좋은 대학 보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부가 맞벌이로 알뜰살뜰 모아 좁아도 내 집 한 칸 마련 하는 게 꿈이었고 퇴근하면 금쪽같은 아이들과 오순도순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밥 한 끼 배불리 먹는 게 전부일진대 그게 그리 어려울까.

이 대목에서 일부가 전체로 표현하는 것부터가 가짜뉴스다. 과거에도 아동학대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엄한 부모가 가정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공영방송의 드라마에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손찌검 장면은 지금 해석하면 영락없는 가정폭력이다. 같은 현상이라도 시대에 따라 그래도 되고 그러면 안 되는 해석의 차이다.

하지만 요즘의 학대와의 차이점을 보면 과거의 부모는 자식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뜻대로 안 되니 힘으로라도 고치려고 한 것이고 지금처럼 가난과 육아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학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결혼은 물론 임신과 출산부터 시대의 변천이 작용한 점도 있으나 업고 안고 손목잡고 줄줄이 연년생으로 키우던 과거와 하나 둘도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작금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육아 문제가 언제부터 나라에서 예산 퍼 줘가며 키워야 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어머니가 집에서 자식을 키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동네마다 한 두 곳씩 있었던 유치원이 영어 단어를 다 써가며 애 보는 집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시간에 집안청소도 하고 취미활동이나 인근 커피숍에서 수다도 떨 수 있는 여권신장의 폭도 넓어지긴 했지만 반대로 울고 우는 아이들과의 공감대 형성은 부족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업고 안고 키우며 엄마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듣던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다 보니 힘든 건 줄었지만 체온의 교감은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가장의 직장은 사라지고 물가는 치솟으며 밀린 월세에 카드빚이 늘어나니 누가 아이들을 낳고 싶고 키울 자신을 갖겠는가.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이니 저출산 대책에 수십 조를 퍼부은들 내 아이 내가 키울 수 없는 세상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최근 뉴스에 보도되었듯 2살배기 아이를 빈집에 방치해서 굶어 죽인 어머니가 과연 제정신일까. 곰곰이 돌이켜보면 책임지지 못할 아이들이 대책없는 임신으로 시작되어 학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환경과 상황 탓이다.

전시행정에 쓰였던 그 예산으로 출산 후 몇 년간만이라도 산모가 마음 편히 산후조리와 육아에 전념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을 사람에게 두었더라면 적어도 뉴스 거리에 등장하는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소아전문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대화 중 소아병원은 일명 돈 안 되는 병원이라는 것인데 세부적인 내용을 듣고 나서야 소아병원을 개원한 이사장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익보다는 공익에 더 비중을 두었던 의료인의 철학에 감사를 표했고 아이들이 아팠을 때 밤낮 가리지 않고 찾을 수 있는 병원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새삼 실감했다.

의료뿐일까. 어린이집의 학대 또한 관계 당국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더했더라면 충분히 사전예방이 가능했던 분야다.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의사 표현 못 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받은 충격은 훗날 커서도 후유증이 심각하다.

맞고 큰 아이, 청소년기 들어서면 잠재된 폭력성이 학교폭력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트로트 가수나 법무부 장관과 스포츠 자매선수의 중도하차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더라도 과거 학교폭력의 전과가 발목을 잡았다.

폭력은 일시적으로 제압의 효과도 있고 급할 때는 빠른 속도를 가져오지만 어떤 식으로든 미화될 수 없다. 영화심의등급에서도 폭력성은 선정성과 함께 심의 요건이 된다.

폭력에 대한 합리화와 함께 모방심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는 한 건전한 인간성 회복운동은 필수적이다.

수도 없이 맞아보고 맞은 만큼 때려본 장본인으로서 폭력은 멀쩡한 인간도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이란 걸 강조하며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했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 땅에 더 이상 어둠의 자식이 성장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해당 부모의 책임이 아니라 편견 없고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가장 우선이다.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그리고 국가의 재산이 국민이듯 이 사회의 재산은 사람이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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