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언젠가는···
[덕암 칼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언젠가는···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3.18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역사의 굴레 속에 사건 발발 당시에는 묻혀 질지 몰라도 권력의 쇠퇴와 시대적 변화를 거치면 언젠가는 모든 진실은 밝혀지게 된다.

문제는 그 시기인데 이미 억울한 당사자는 누명도 벗지 못한 채 고인이 된 후 어떠한 보상이나 사과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운이 좋아 수 년 만에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전직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그랬고 당장 드러난 LH 토지 투기 문제가 그러하다. 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나서야 밝혀지는 진실은 밝혀지더라도 당사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난 16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시작된 총 335명에 대한 재심 재판 21건의 선고 공판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놔야 할 기막힌 사건의 판결이었다.

72년 만에 재심 결과에 대해 법정에 참석한 피해자와 유족들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된 데 대해 변호인들은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이어 증거가 없다면 검사가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주문했고 판사는 72년 전 4·3 당시 군법회의에서 판결한 범죄 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의 유죄가 무죄로 판결 날 때까지 겪었던 피해자들에 대한 억하 심정은 누가 어떤 식으로 보상할까. 죄 없는 양민들의 자식까지 연좌제라는 대물림으로 얼마나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 왔던가.

무죄를 밝히는데 72년 이란 시간이 걸렸다면 그동안은 왜 밝혀지지 못했으며 죄를 뒤집어 씌운 그 이면의 가해자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역사적 침묵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판사는 국가가 완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 피고인들은 목숨마저 빼앗겼고 자녀들은 연좌제에 갇혔다고 했다.

국가라는 포괄적 단어로 유족들을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판결 이후 그 가해 당사자가 누구인지도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며 일시적 위력으로 인한 범죄가 당시에는 가능하더라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지금은 어떤가. ‘힘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 했던가. 그 어떤 상황이든 진실은 밝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힘으로 진실을 뒤덮는 사례는 반복될 것이다.

4·3 당시 빨갱이로 몰려 희생된 2500여 명의 수형인 모두가 그때도 죄가 없었고 이번 판결로 죄가 없음이 확정되었으니 자손까지 무죄로 인한 피해보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이 사건은 명예회복과 함께 피해보상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올해 73년째를 맞는 4·3사건은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진실규명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이번에 피해자 보상을 위해 국회에서 제정한 개정안 제16조에 국가는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에 대해 위자료 등의 특별한 지원을 강구하며 필요한 기준을 마련한다고 규정했다. 통과된 개정안은 공포 후 3개월이 경과 한 오는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돌이켜보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과 생필품의 부족은 물론 콜레라의 창궐과 극심한 흉년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의 재난지원금에 준하는 구휼미의 실패와 친일행각으로 자국민을 괴롭히던 자들이 다시 경찰로 부활하는가 하면 정치인들의 부패가 극에 달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안 그래도 폭발 직전에 있던 도민들의 분노가 가중되면서 일명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들이 조직적인 저항을 하면서 본격적인 유혈극이 펼쳐진 사건이다.

대규모 민·관 총파업에 이어 도지사를 비롯한 군인과 정치인들이 모두 교체되면서 본격적인 검거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한 달 만에 500명 1년 동안 2500명이 구속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된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350명의 무장대는 본격적인 전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된 것으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린 제주 4·3사건은 한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으로 기록됐다. 이렇게 오래 걸려야 했던 이유가 명확해야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텐데 지금 와서 무죄면 끝인가. 가해자들은 말이 없다. 그게 문제다.

반면 1980년 5월 18일 지금의 미얀마 사태와 유사한 광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같은 행태가 벌어진 바 있다.

기록을 인용하자면 사망·행불·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인정된 보상자는 총 4,362명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와도 총을 쏘았다는 가해자는 사건 발생 41년 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3월 17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사망한 희생자의 유족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현장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가해자는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무릎을 꿇었고 피해자는 늦게라도 사과해 줘 고맙다고 말했다. 정작 사살을 명령한 자는 함구한 상태에서 말이다.

전자는 73년 걸렸고 후자는 41년 걸렸다. 둘 다 공통점은 진실이 밝혀진 듯 하지만 가해의 주인공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밝히려면 제대로 밝혀야 한다.

김균식
김균식 다른기사 보기
kyunsik@daum.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