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상징적 정체성
촛불의 상징적 정체성
  • 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 kmeil
  • 승인 2008.07.2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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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13일 한,일월드컵 열기가 가득했던 그날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서 귀가 중이던 중학교 2년생 신효순, 심미선양이 미군의 궤도차량에 깔려 숨졌다. 차량 훈련 중이던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해 미 군사법정이 무죄 평결을 내리자 소년들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했던 수많은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밝혔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촛불은 여학생들의 한을 달래주는 추모의 촛불이었다. 촛불이 상징적 정체성의 첫째는 추모다. 학생들의 희생 원인은 미군 장갑차다. 그리고 사고병사들에 대해 미 군사법정이 무죄판결을 했다. 한국 땅에서 한국인을 처참하게 죽게 한 사건에 한국의 사법기관이 아예 관여조차 할 수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원망의 불길이 촛불로 변했다. 이번에 반미 촛불데모는 미국쇠고기 광우병파동으로 나라를 시끄럽게 했다. 첫째 잘못이 이명박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견해다. 미국으로 달려가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협상을 위해 선물을 준다는 뜻으로 쇠고기협상문제를 크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동차수출 등 경제적 이익과 그동안 소원했던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겠다는 의도였다고 본다. 그러나 쇠고기 문제는 식생활과 국민건강이 달려있는 문제다. 광우병쇠고기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민의 건강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미국에 잘 보이겠다는 뜻이 국민들의 대미감정을 악화시킨 것이다. 쇠고기 수입반대 데모에 촛불이 등장한 것이다. 촛불데모는 상징적으로 그 정체성이 “반미”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명박대통령의 퇴진까지 몰고 가는 꼴이었다. 촛불은 자기를 태워서 자기 힘으로 빛을 낸다. 어쩌면 촛불의 상징적 정체성을 주체성으로 성격지울 수도 있다. 주체성이란 내가 내 생활의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조직과 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활에서 스스로가 주인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이고 권위가 서는 것이다. 내가 내 생활의 주인노릇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생활을 개척해 나갈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촛불이 추모와 반미의 상징적 정치성을 가졌기에 개척과 창조적 역할과는 괴리가 있다. 1919년 자주독립을 외친 우리 조상들은 횃불을 높이 들었다. 그러기에 인도의 세계적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타고르가 우리를 가르켜 “빛은 동방에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횃불로 대한민국은 건국되고 세계속의 일류국가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민족주체사상을 상징하는 불은 촛불이 아니고 횃불이다. 우리는 촛불의 상징적 정체성을 독창력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촛불과 달빛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요컨대 촛불이 달빛보다 더 값이 있다는 이야기다. 초는 자기를 태워서 자기 힘으로 빛을 내는데 비해서 달은 햇빛을 반사해서 남의 힘으로 내는 빛이다. 모방은 남을 의뢰해서 남의 힘으로 내는 빛이다. 하나는 뜨겁게 살아있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차갑게 죽어있는 빛이다. 독창력을 촛불에 비유하는데 한 가지 적절치 않은 것은 물론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촛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연소해서 줄어들지만 독창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커진다.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밝아진다. K.C 질레트는 안전면도를 발명한 사람이다. 촛불 같은 아이디어를 끌어냈고 1895년부터 그의 몸을 불태워우는 노력으로 1903년 안전 면도날을 완성했다. 촛불을 밝히는 젊은이들이여! 지식사회에서 촛불의 역할은 독창력을 발휘하여 발명의 세계에 우뚝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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