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職者의 양심은 淸廉性
公職者의 양심은 淸廉性
  • 원춘식 편집국장 직대 kmaeil
  • 승인 2008.08.1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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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새 공직자상이 필요
우리나라 최고 청백리(淸白吏)는 신라의 화랑 검군(花郞劍君)이다. 극심한 흉년을 당해 동료들이 국고의 곡식을 훔쳐 나눠가진 뒤 그에게도 한몫 주었다. 검군은 화랑으로서 의(義)가 아니면 비록 천금(千金)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물리쳤다. 그를 죽이려해 피신할 것을 권하자 검군은 그들이 잘못되고 내가 정직한데 왜 내가 도망가느냐며 거절했다. 그는 피살됐고 죽음으로 지킨 그의 청백(淸白)정신은 후대에 귀감이 됐으며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발전했다. 청백정신이 공직자(公職者)윤리로 확립된 것은 관료체계가 정착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서다. 청백리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근본이념으로 삼고 기개지고 금욕으로 정직하게 생활하며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나라의 동량이 되는 지식인(知識人)이다. 세종(世宗)때 청백리가 많아 현군(賢君)아래 명신(名臣)난다고 세종 때 유난히 청백리가 많이 배출됐다. 90평생 청빈(淸貧)으로 일관한 황희(黃喜)는 육조판서를 모두 거치고 영의정(領議政) 만 18년을 역임한 관직생활 60년의 청백리로 조선리도(朝鮮吏道)의 귀감이 됐다. 그로 인해 세종 같은 임금님에 황희같은 정승이면 살맛난다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우리 역사상 세종시대가 가장 진취적, 창조적, 도덕적 사회정의가 구현된 시대라고 한다. 그렇게 된 데는 황희, 맹사성, 류관, 박팽년, 성삼문 등 명성 높은 청백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 모두 집이 워낙 비좁아 비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유관은 우산으로 가리며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이 비를 어떻게 견딜고 하고 걱정했다. 현직 병조판서로 별세한 이이(李珥)의 집에 장례 치를 양식이 없었고,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명상(名相) 유성용(柳成龍)이 낙향해보니 끼니를 이을 수가 없었다 한다. 두 분 모두 관직에 있을 때 서울에 집 한 칸 없어 셋집에 살았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임란(壬亂)등을 극복하며 500여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청렴성을 최고 가치로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현종 이후 철종, 고종, 순종 때에는 단 한 명의 청백리도 없었다. 중국 송(宋) 나라 때의 청백리는 나라의 녹(綠)을 먹는 동안 다른 영업은 일절 중지했다 한다. 아내가 텃밭에 아욱을 심는 것조차 아욱재배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뽑아버렸다. 오늘의 공직자들은 이처럼 출중한 청백리와 비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직사회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서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직사회가 썩으면 동시에 국기(國基)가 흔들렸던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공직자 원리법도 개정하고 윗물 아랫물 맑게 하기도 계속 후진해야 한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해 마련된 법과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국민의 대리인이다. 공직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정부는 수탁기관이고 공직자는 수탁자다. 그런데 이들이 권력과 부(富)를 한꺼번에 거머쥔 거대한 불가사리로 변신, 백성들을 짓밟고 수탈했다. 참다운 공직자는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나름대로 봉사 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 인격의 핵(核)은 자존심에 있다. 자존심을 잃으면 치욕을 모른다. 자존심의 핵은 양심에 있다. 양심을 잃으면 허위와 죄악에 빠진다. 공직자의 양심은 다름 아닌 청렴성(淸廉性)이다. 청렴성을 상실한 공직자는 사이비 인격자다. 이명박 정부는 새 공직자상이 필요하다.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 언니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게 해주겠다며 30억원을 받은 사건이 끝나기도 전에 집권당 간부가 국방부 상대로 전산 장비 납품과 관련해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정부는 업자(業者)들에게 권력 주변을 기웃거려봤자 감옥 갈 일 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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