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생물의 生命體
땅은 생물의 生命體
  • 원춘식 편집국장 wcs@
  • 승인 2008.09.1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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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모든 생명의 종착역이다. 땅으로부터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나와 네가 바로 그런 존재다. 기독교 경전 창세기는 말한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가 세상을 어떤 모양으로 살았건 그의 마지막 장례식이 어떻게 치러졌건 무덤의 주인공이 되게 마련이며, 그리고 나면 얼마안가 모두 한줌의 흙이 되게 마련이다. 땅은 사람의 삶이 시작되며 끝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시작과 끝만이 아니다. 땅은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젖줄이다. 그러기에 땅이 없는 사람의 삶이란 불가능하다. 오늘날 이 나라는 「땅 문제」가 소위 체제의 존속이라는 위기의 관점에서 설왕설래되고 있다. 땅이 이처럼 최대의 화급한 문제로 앞서 다가서게 된 것은 부동산 투기가 자아내는 사회적 통증 때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 올라가기만 하는 땅값이 모둠살이의 토대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다. 한국의 땅을 한국 사람들이 고루 나누어 가지고 있다면 땅값이 천정(天井)부지인들 무슨 큰 상관이 있으리오마는 이 나라 인구의 5%가 이 땅의 70%를 몰아 가지고 있다하니 문제 중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평당 10만원하던 땅값이 몇 백만 원이, 몇 천여만 원이 된다고 해서 사람의 삶에 필요한 무슨 물건이 세상에 더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물건의 증가 없이 돈뭉치만 세상에 더 늘어날 때 눈감고 가만히 앉아서 몇 배로 재산이 늘어나 떼돈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땅주인이요 그와 더불어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품삯으로 받는 돈의 값어치가 거꾸로 곤두박질 당하는 사람들은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땅값의 폭등은 부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땅 못 가진 사람으로부터 땅 가진 사람에게로 돈은 옮겨 놓은 경제의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의 운동이 바로 땅값의 폭등인 셈이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람이 살만한 세상 이상적인 사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얼마나 많은 거창하고 현학적인 언어로 분장한 이론들과 학설들이 앞을 다투어 저 이상적인 모둠살이 틀에 관해 이야기해 왔던가.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것은 무력감과 허탈감만을 느끼게 하는 모둠살이의 틀은 결코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별 수가 없을 때 사람들은 깊은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이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할 때 사람은 팔다리를 움직이길 멈추고 깊은 탄식 속에 빠져들게 된다. 그 앞에는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의 어두운 장막이 꿈으로 현실화 된다 하더라도 희망에 최선의 노력이 동반될 때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닌 현실의 열매로 드러난다. 최선의 노력이 희망의 열매로 바꾸어지는 세상은 낙원은 아니더라도 살아볼만한 세상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땅값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일확천금하는 떼부자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은 정녕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 봤자 무엇하랴는 소리가 보통 사람들의 입가에 울려 퍼지는 세상, 이런 세상은 결코 어떤 아름다운 언어와 현란한 이론을 가지고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근면과 성실로 일하는 사람에게 휘황찬란한 궁궐은 아니더라도 일과 후 산뜻한 밥 한 그릇을 끓여 먹고 하룻밤의 단잠을 자기에 충분한 공간이라도 주어질 때 보통 사람의 희망의 싹은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희망을 앗아가는「땅의 괴질」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는 토지 개념에 대한 세 가지 입법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은 토지거래 허가를 받아 거래하도록 되어 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지혜는 「더불어 삶」에 필요한 생각과 몸짓이다. 무엇보다도 땅은 더불어 있음의 토대이다. 사람은 땅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을 뿐, 땅을 업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땅에 대한 참사랑은 결코 탐욕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땅은 몇 사람이 많은 땅을 소유하기엔 너무나 협소하다. 우리가 이 좁은 땅에서나마 살만한 세상을 만들고 살 것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공동의 생명권으로서의 땅의 의미를 우리가 얼마나 실천적으로 살려 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많은 땅을 소유한 부자라도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사용하게 될 땅은 고작 몇 평의 땅 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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