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와칸 회랑(Wakhan Corridor)”의 청와대에 “긴급 타전”, 미국의 “복리(複利) 계산”!!
[사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와칸 회랑(Wakhan Corridor)”의 청와대에 “긴급 타전”, 미국의 “복리(複利) 계산”!!
  • 이찬엽 논설위원 pinetree0516@hanmail.net
  • 승인 2021.08.2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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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엽 논설위원
▲이찬엽 논설위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는 “예정된 프로세스”였다. 은밀히, 몇 년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었다.

헌데, 철군에 대한 분노, 무엇 때문인가? 원래는, 9.11 테러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경유(經由)”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주변 5개국의 회교도 앞에선 아무런 희망도, 경제적 이익도, 국제정치상 위상 제고도, “맹탕”이었다.

한편으로는, “자국은 자국민이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미국은 아프간을 “조롱”했고, 역사를 “건성”으로 알았으며, “조지 워싱턴의 유훈”을 게을리했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아직 남아있는 정부군 일부와 탈레반에 반기를 든 각 주의 군병력, 특히, 아프간국민의 “봉기”를 노리고 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바이든은 구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프가니스탄의 경제적 공황에서 비롯될 것이다. 즉, “내전”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그건 국고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더욱 재촉할 것이다. 아프간이 민주주의도 아니고, 전체주의도 아니고, 나아가 아무런 정체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경제력이 없으면, 국가는 “마비”되게 되어 있다.

미국은, 무기는 버렸지만 “돈줄”은 놓지 않았다!! 아프간이 더 처참해지고 국제사회에 애원할 때 조금씩 풀 예정이다.

이미 미국과 아프간은 철군과 “정권 이양”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본 상태다!! 암묵적 합의는 “중국”과 관련됐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아프간이, 미국에 대하여 테러를 한다면, 미국 본토가 전쟁과 테러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란 것 때문에, 미국은 편한 잠을 이룰 수 없다!! 제2의 9.11테러도 시간문제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필요성이 “증폭”된다!!

자. 그럼. 미국의 주둔이 왜 실패했는가를 살펴보자.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아랍권에서 가장 복잡한 역사를 지녔다.

한마디로, 강대국 “패권주의의 전쟁터”였다. 구체적으로, BC 6세기경 페르시아 침입, 알렉산더제국 침공, 7세기 중엽 아랍족 침공(이슬람교 전파), 10세기 마흐무드 가즈니 침공, 13세기 초 칭기즈칸의 몽고제국 침입, 14세 티무르 집권(안정기), 16세기 중엽 인도 무굴제국의 카불 수도 지정, 18세기 중엽 이란계 두라제국 건설, 18세기 말엽 최대 이슬람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그 후, 19세기 초 내전 거듭, 영국 아프가니스탄 개입, 19세기 중엽 이후 영국과 러시아 간 주도권 싸움의 희생양, 제1차 아프가니스탄 영국 전쟁(1838년~1842년), 제2차 아영 전쟁(1878년~1880년), 1919년 제3차 아영 전쟁, 1919년 8월 독립, 아마눌 왕 집권, 다우드 수상(대통령) 1973년 쿠데타‧왕정폐지‧공화제 수립, 소련원조 다우드의 쿠데타 이후 “공산주의 폭증”, 공산혁명과 소련과의 전쟁(1978년~1981년), 1987년 무함마드 나지불라 대통령 선출, 무자헤딘의 무함마드 나지불라 정권 전복(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

여기서부터 지금의 “탈레반”이 관여하게 된다. 5년 후, 1992년 라바니 대통령 당선, 반 라바니 전선 구축, “내전 확산”, 1994년 “파키스탄과 수니파 탈레반” 지원, 라바니 정부 러시아에 원조 요청, 1996년 9월, 탈레반의 라바니 정권 축출, 2001년 9월 미국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탈레반 정권 비호, 오사마 빈 라덴‧알카에다 잠적), 2001년 10월 미군의 군사공격,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 붕괴, 2004년 10월 카르자이 대통령 당선, 2009년 8월 카르자이 대통령 재집권, 2021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아랍에미리트로 도피 등의 역사를 가졌다.

아프간은,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한반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녔다!! 특히, 국제정치의 화약고 “와환회랑(와칸회랑: 비단길 일부: 중국을 찌르는 검(劍), 19세기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패권주의의 무대)”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한마디로 “유린(蹂躪) 역사”다!!

그러면, 미군이 주둔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엔 어떤 사건이 있었나? 그건 볼셰비키(레닌파)의 “소련”과의 삶이냐 죽음이냐의 싸움이 있었다.

이걸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쉽게 점칠 수 있다. 상황을 말하자면, 소련(브레즈네프)과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그러니까, 9년 2개월여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당시, 소련 “지령”의 모하마드 타라키의 쿠데타(하피줄라 아민 대통령 살해), 친소정권 수립, 소련 괴뢰정부의 급진적 근대화 개혁 시도, 무자히딘 반군세력과 기독교‧이슬람 국가지원(34개 이슬람국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친소괴뢰정권, 인민민주당(PDPA)) 간의 연합전쟁을 벌였다.

전쟁의 발단은, 인민민주당(PDPA)이 농민들의 종교를 간섭했고 전통을 획일화 한데서 출발했다. 아프간이 회교국 중 가장 보수적인 국가였던 것!! 전쟁결과, 소련의 해체는, 미국에 “반면교사”로 작용했던 것!! 

종전, 소련의 후계자 러시아는, 러시아연방에 포함된 자치공화국인 체첸과의 전쟁(1994)을 경험했고, 결과, 비참한 패배를 인정한 바 있다.

그리고, 미국도 베트남전쟁(1960∼1975)에서 패한 바 있다. 패배원인은 상대국의, 정복하기 어려운 문화구조, 게릴라전에 능숙한 근성과 체질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미국은 과욕을 했고, 미국의 현재 과욕 상대는 “한반도”다!! 

아프간에는, 언급한 바대로, 9.11테러 후, 이에 대한 응징으로, 수도 카불에 친미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한국 정부도, 2001년 12월부터, 해군수송지원단(해성), 공군수송지원단(청마), 국군의료지원단(동의), 건설공병지원단(다산) 2014년 6월 아프간 지방재건팀(PRT) 방호부대(오쉬노) 등 총 1,700여명을 파견했다(국방부 참조). 임무 종료시까지 20여만 명의 동맹군 및 아프간 주민에 대한 진료‧건설의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은 매우 적극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개입했다. 결과, 아프간과의 관계는 좋았다!! 이란처럼 척을 지진 않았다. 먼 국가든 가까운 국가든 척을 지지 않는 외교가 필수다!! 그런데, 왜 반대로 가려 하는가?? 균형감각이 없다!!

그렇다면, 다 쓰러져가던 탈레반이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을까? 그건 다름 아닌 “양귀비(Poppy)”재배와 밀(密)수출이었다. 양귀비는 헤로인의 원료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게 만든 아편 수출로 10억 달러, 헤로인, 그리고 모르핀 수출로 20억 달러, 한 해 30여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친미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도 벌였으나, 이를 막지 못했고,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잡는 계기를 주게 되었다.

영국도 개입하여, 2006년부터 2년간 700만 달러를 대체 생계수단으로,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3)에 제공하려 했지만, 이도 실패, “준군사 조직”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엉성했기에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무기 포함) 100조 달러를 원조했지만, 친미로의 발전 가능성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단지 “비효율적”이라는 핑계로 철군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달포도 되지 않아 수도 카불이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 역사 중 대부분을 “내전”으로 보낸 아프간에서, 수도 탈환은 “통상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아프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악수(惡手)는 두지 않았을 것을!!

혹자는 이를 보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의 비극에 비유하고, 결과, 한국에서 미군철수시 순식간에 “공산화”되리라는 비관적 전망도 한다.

그러나, 그건 틀린 전망이다!! 오히려, 미국은 더 한국에 집착할 것이다. 왜냐면, 북을 포섭하고 중국을 제압하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군부만 도려내어) 북이 “친미국가”로 거듭난다면 (중국입장에서는) 최악 아닐까??

그렇다면, 바이든이 왜, 전략적 요충지를 포기하고, 카불을 유기(遺棄)했을까? 그리고, 3000조나 되는 세계적 광물(철, 구리 등 희토류 및 충전용 배터리용 리튬)을 포기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때문이다. 신장 위구르는 18세기 청에 복속, 그 이후 영향력 이탈, 1949년 중국에 복속, 1997년 대규모 폭동, 이슬람 세계로부터 독립 압박 등의 반중 노선을 걷고 있는 지역이다. 한반도의 8배가 되는 면적을 가졌다.

독립하면, 세계 15위권이다. “중국 배후”를 직접 위협하고도 남을 대국이 된다!! 물론, 포기는, 군사 경제‧행정적 비효율성도 큰 이유였다!! 한국은 카자흐스탄 및 신장 위구르 등과의 “적극 외교”를 해야 한다!!  

미국은 철수하면서 자국의 전쟁물자(전투기 100여대)를 그대로 두고 떠났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IMF 등을 통해 자금줄을 차단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이슬람권의 독립투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다. 즉,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한 중국,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독려하려는 기획이다.

좀더, 상황을 구체화 해보면, 위구르 독립은 물론, 남하하려던 러시아의 패색(敗色), 도무지 개량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아프간의 문화적 성격,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정책(실크로드 경제정책)”의 차단 등을 모두 고려해 보았을 때, 군사력의 “동북아 집중”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페르시아만을 포함) 중동에 파견된 미군만으로도, 충분히 아랍권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미군 6만여명). 전략적 값어치가 높은 동북아시아 즉, 한국, 일본, 대만을 택한 것이다(미군 12만여명). 이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였다!! “바이든”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위와 같을 진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청와대에 긴급 타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의 적은 “한국이 아니다”라고, 결국, 바이든의 계산은, 이슬람세력을 이용, 중국을 후방에서 도모하고 북경과 가까운 한국과 대만을 통해서, 중국을 “세게 압박”한다는 전략이다!!

미국이 필요한 것은 한국, 일본, 영국 그리고, (두고 온 무기가 향하게 될) 중국 후방의 “이슬람”인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쉽게 공습”한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공격은 잘하나 방어에 허술한) 미국은 잘 안다!! 지금, 한국과의 군사동맹이 왜 절실한지, “백악관의 바이든”은 “복리로 계산”했고, 그것을 실행 중이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미국의 존망(存亡)”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이찬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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