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덕암 칼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9.1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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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소설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운명에 저항하며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두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불교에서는 번뇌라고도 표현한다.

언제 부턴가 죽음을 운명이 아닌 각자의 선택으로 판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2020년 통계청 발표기준 한국의 자살률은 연각 13,799명으로 하루 37.8명이다.

특히 20-30대에게 집중되고 있는 건 더욱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21년 3월 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열린 기자회견에는 출생율을 올리는 것 못지않게 자살률을 낮추는 정책이 필요하다면 20대 여성들의 자살율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요청했다.

국회 행정 안전위원회 소속 이은주 정의당 국회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이후 고의적 자해가 급증하고 있다며 특히 10-20대의 증가폭이 컸다고 밝혔다.

자해란 스스로를 해치는 현상으로 자살의 전조증상이라 할 수 있다. 자살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경고등이 켜진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대한민국이 무슨 일이 있길래 아이들의 죽음이 줄을 서는 것일까. 2020년 자살, 자해시도는 20대가 28.3%로 가장 높았고 30, 40,50대 순으로 이어졌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오히려 아직 인구가 많다는 70대나 80대는 5%미만이었다.

문제는 자살에 성공한(?) 사람보다 시도했으니 미수에 그친 인구수가 잠재적 위험 군으로 분류되는데 지난 2021년 자살시도자는 2만 2,572명이로 나타났다.

물론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숫자까지 감안하면 실제 위험인원에 포함되는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반사회적, 직장이나 학교의 왕따, 등 물리적 원인보다는 정신적 원인이 훨씬 더 많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얼마든지 대화를 통해 막을 수 있음에도 방관 내지 무관심으로 예방의시기를 놓친다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보자면 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 2월 20일 이후 567일간 사망한 사람이 2,343명으로 하루 평균 4명이 사망했고 올해 2월 26일 이후 196일 동안 백신접종으로 사망한 사람은 8390명으로 하루 평균 4.2명에 달한다.

물론 정부 방침대로 직접 사인으로 밝혀진 것은 훨씬 적지만 사망자 측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계산상 돈 때문이든 사는 게 힘들어서든 코로나기간 동안 자살한 사람의 숫자는 계산상 21,432명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질병보다 돈없어서 죽는 사람이 10배나 더 많은 셈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백신 부작용에 대해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보니 살려고 맞아야 하느냐 부작용이 무서워 안 맞느냐의 선택에 서게 됐다.

마치 맞고 사느냐 맞고 죽느냐와 같은 논리다. 사는 게 요지경이다. 이제 백신은 선택이 아니듯 죽음또한 선택이 아닌 세상으로 가고 있다.

정부 방역지침을 못 믿어 안 맞으면 각종 제제가 따를 것이고 얼마 못가서 어지간한 공공장소는 출입조차 못할 것이며 부작용이 두려워 피하는 자들은 마치 좀비 취급당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같은 문제는 현재 진행형인 사항들이고 일반 국민들이 자살예방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자.

일단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은 물론 친인척, 친구, 동호인, 같은 교회 교인, 학교급우 등 주변인들의 정황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고쳐먹고 선해질 수도 있겠지만 평소 구두쇠가 마치 체념한 듯 선심을 쓴다거나 살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이 과도하게 느슨해진다면 전조증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극단적 선택을 못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인 안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언제든 계기만 있으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단계다.

가장 큰 이유로 경제적, 정신적, 인간적 관계 등 다양한 조건들이 있지만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말이야 주민센터나 각 지역마다 자살예방센터나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홍보가 줄을 서지만 과연 그걸 홍보하는 담당이나 센터에서 극단적 환경에 처해질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대안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정해진 매뉴얼대로 마음을 편히 갖고 천천히 말해 보라면 누가 시키는 대로 할까. 극단적 선택은 수 십 번 시도해서 실패해 보았거나 먼저 간 사람의 처참한 뒤처리를 해 본 자 만이 진심으로 조언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다.

필자가 적어도 이 같은 경험을 통해 마련한 자살예방센터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러오는 가녀린 목소리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살려달라며 절규하는 애절한 구조요청이자 마지막 이별의 통보이기도 하다.

어설픈 이론으로 목숨을 건 사람의 입장을 논하는 것 자체가 외려 부추길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은 제 18회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다.

흔히 죽을 만큼의 결단이면 그 결단으로 살아보라고 한다. 책상머리에서 제때 월급 받는 자들이 하루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죽음은 아무 때나 아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며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한다거나 그럴 수 있다는 말조차 삼가야한다. 할 수만 있다면 가진 돈과 입은 옷부터 내주고 눈으로 쳐다보며 손을 잡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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