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멈추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
[덕암 칼럼] 멈추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10.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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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지리적으로 사계절이 있는 한반도는 적도 부근이나 남·북극과 달리 춘하추동이라는 자연의 변화를 체감하며 한 해 한 해의 지남을 체감할 수 있다.

덕분에 같은 자연환경이라도 생동감 넘치는 봄과 뜨거운 여름, 만추의 장관과 한 폭의 설경을 볼 수 있으며 의복, 농사, 24절기 등 다양한 부분에서 인간의 삶과 유사한 생로병사를 체험할 수 있다.

자연이 이러하듯 사람 사는 세상 또한 살아 꿈틀대는 생물처럼 늘 격동의 변화 속에 잠시도 멈추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로 굴러왔다. 각설하고, 그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8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88년 2월 56세의 나이에 13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5년 단임제와 직선제를 시행한 첫번째 대통령이었다.

나라의 대통령까지 어물쩍 대충 만들어 내던 시대에서 국민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화의 상징적 선거가 시작된 것이다.

28년 전 1987년 10월 27일 제9차 헌법 개정을 위한 찬반투표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시행한 날 이기도 한다.

하지만 재임 시절 ‘보통사람’들을 연호하며 “이 사람 믿어주세요” 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까지 무사히 마치는가 싶더니 퇴임 이후 2년 만이자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5년 10월 27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게 된다.

재임하던 5년 동안 기업인들로부터 통치자금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5000억 원의 정치자금을 걷어 쓰고 남은 1700억 원을 다시 돌려주지 못했다는 게 사과문의 내용이었다.

같은 해 12월 5일 총 35명의 기업인들로부터 283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도 자신 외에 누구도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기업인들의 뇌물상납을 비호했다.

뇌물이란 적어도 받친 금액 이상의 본전을 뽑기 마련인데 그때 구속되어 곤욕을 치렀다는 내용은 지금까지도 없다.

당시 법원은 기업인들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는데 지금의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곤욕을 치르는 국정농단과 비교해 봄직하다. 같은 범죄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때 ‘범죄와의 전쟁’으로 세간의 입에 안주거리가 되던 노태우 전 대통령, 군사독재의 마지막 무대를 종식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렀지만 겉으로 보여주는 풍광과는 달리 질서를 명분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진 노점상이나 대대적인 거리정화의 명분으로 형제 복지원의 묵인 등 불편한 진실도 많이 남겼다.

여기서 역사의 변곡점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사실 노태우 정권의 태동이자 출발점은 1980년 이른바 체육관선거라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을 득표율 100%로 선출했던 민정당의 전두환 대통령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쿠데타로 국민들 위에 군림한 군사정권은 12대 대통령까지 이어지기도 모자가 전두환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가 등장한 것이다.

6·29선언부터 깜짝쇼에 온 국민이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민주화의 잔다르크 같았지만 초록은 동색이었고 결국 나란히 수의를 입고 철창을 향했다.

이 때 정권의 창출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상 군부 내의 친목단체인 하나회의 공로가 컸다. 지금도 정계에서 누구의 적자, 정통파 등 계파정치가 마치 조폭의 계보인 마냥 거론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동교동, 상도동, 특정 정치인의 거주 지역이나 친박·친이 등 친분의 대명사 또한 역사의 재조명에 걸리면 여지없이 숙청이나 다름없는 척결의 대상이 된다.

권력의 이동,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 서거이후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인들의 권력이양은 암울한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졌고 진작 와야 할 민주주의의 새벽은 길고 긴 밤이 지나고서야 밝아지기 시작했다.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대통령 후보들의 조문이나 반발도 엇갈린다.

국민들 견해도 가난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일궈낸 구국의 상징이라거나 일본군 장교의 과거를 가진 독재자라는 비난으로 상반되고 궁정동의 총성으로 막을 내린 과정 또한 반란이나 혁명으로 나뉜다.

대통령을 총살한 반역자라는 것과 독재의 종식이라는 견해는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앞으로도 쉽게 결정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사태 또한 이유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1년 12월 1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킴으로서 사실상 국민들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 선언으로 이른 바 10월 유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언론은 물론 국민들의 모든 분야에서 통제가 가능한 암흑시대로 돌변하면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지만 군홧발에 짓밟힌 인권은 무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렸다.

이 과정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 단독후보에 대한 선출권을 갖고 100% 참석 99% 찬성이라는 공산주의에서도 볼 수 없는 선거결과를 낳았다.

잠시만 시간을 내서 검색해보면 유신정우회라는 조직의 명단과 작성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사조직은 국회의원 명단까지 대통령이 임의로 작성해 입법기관을 구성할 수 있는 막강한 시스템이었다.

훗날 전두환 대통령의 성장 동력이 된 하나회나 현재도 계파정치가 판을 치고 있는 상항을 비교해 볼 때 등장인물만 달랐지 패거리 정치문화는 여전한 셈이다.

지금의 대권후보들은 당시에 초등학생 정도였을 텐데 여전히 그 패거리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지사를 사임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방문해 여론을 모았고 윤석열 후보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 하는 등 대권후보 조차 과거의 인맥이 표심임을 알고 망자에게도 손을 내민다.

국민들이 대통령 한 사람을 뽑지 언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만들었던 것 마냥 언론이 만든 대통령과 그의 패거리를 뽑는다던가. 배고픈 늑대 백 마리 보다 당당한 호랑이 한 마리가 낫다. 어찌하든 역사는 흐른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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