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가봐야 할 곳 재한유엔기념공원
[덕암 칼럼] 가봐야 할 곳 재한유엔기념공원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11.12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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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 독자들 중 이곳을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필자도 2012년 겨울 방문한 적이 있는 이곳은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11개국에 2,311기의 전사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UN기념공원이다.

어제 같은 날 온라인을 통해 헌화하기를 누르면 헌화가 완료되는데 먹고 살기는 바쁘지 않지만 그들로 인해 얻은 자유를 누리느라 추모하기에는 시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추모공원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 터키, 영국 등 전쟁 당시 참전했던 유엔군 소속 군인들과 묘비는 없지만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던 미군까지 안장되어 있다.

유엔군은 미군을 포함해 22개국 장병 195만여명에 달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소중한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이들의 고마움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쟁이 났으니 군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며 휴전 6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세상에 절로 되는 일은 없는 것이며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했으니 되갚은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구든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 6·25전쟁이나 전세계 어느 전쟁을 보더라도 군인의 첫째 소망은 승리해서 1계급 특진이나 훈장을 받기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지휘관의 오판으로 하나 뿐인 목숨을 잃는가 하면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세에 따라 진군과 후퇴를 거듭하는 악전고투를 감내해 왔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사계절이 없는 환경에서 살던 군인들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막막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추위는 물론이고 보급 상태나 의무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을 텐데 누굴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헤매고 다녔을까.

그러기에 그런 희생을 전제로 최소한 수혜를 입은 국민이라면 유엔기념공원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예의 아닐까. 필자는 국민들에게 감히 권한다.

좁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다 못해 해외여행이 러시를 이루는 작금의 풍요로움의 과정에는 이들의 희생이 분명했다.

한번쯤은 세계 10대 미항에 속하는 부산항을 관광하는 길에 유엔기념공원도 들러보면 어떨까. 추모의 참뜻은 희생자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잘했다고 칭찬해줄 일도 아니다.

오직 자신에게 뜻있는 행보를 했다는 보람과 누군지도 모를 고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일이다. 비록 분단 되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먹고 살 걱정은 안 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과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희생된 군인과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부모들에게 더 없이 고마운 일이다.

돌이켜보면 전쟁 전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지만 일본의 지배에서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처음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했다.

이후 정부의 뜻과는 달리 강대국들이 신탁통치에 합의하자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하고 우파는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는 모습은 지금의 좌파·우파, 여당·야당으로 갈라지는 것과 뭐가 다를까.

그때부터 분단의 아픔은 지금도 영남·호남으로 지역감정을 일으키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이 과연 국민의 뜻이었을까. 권력을 탐내는 정치인들 때문일까.

한반도에서는 남한·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이 공식화되면서 북한은 미·소 양국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소련은 그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자 남한에서도 1949년 6월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미군이 철수한 것이다.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뒤늦게 유엔에서 북한의 원조를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유엔군의 참전이었다.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협정’으로써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지 못하는 출발이었다.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 기념묘지로써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하였으며 같은 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한 곳이다.

문득 체첸공화국 군인이 러시아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전사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백학이 되어 고향을 찾는다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이기도한 ‘백학’은 오늘처럼 유엔기념공원의 배경음악으로 어울릴듯하다. 어제는 유엔기념공원을 기념하는 날이다.

황금빛 가을 단풍이 흩날리고 스산한 진눈깨비까지 날리는 추모공원을 걷노라면 전쟁터의 빗발치는 포탄 속에 오직 자유를 위하여 혈전을 치러야했던 당시의 참상이 떠오른다.

그렇게 얻은 자유이기에 마냥 누리기만하면 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신세를 져도 먹고 살만하면 한번쯤은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 찾아보는 도리는 사람으로서 기본이다.

하물며 물도 산도 낯선 타국에서 전쟁의 희생양이 된 그들의 죽음 앞에 과연 우리는 어떤 도리를 했으며 지금도 대통령선거에 나서려는 후보들이 표가 될 만한 민주화의 성지 광주나 국립묘지는 찾아도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손님의 무덤이다. 이러고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과연 누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총을 들 것인가.

무릇 사람의 마음은 대동소이한 것이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은 더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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