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다시 불러보는 처용가
[덕암 칼럼] 다시 불러보는 처용가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3.21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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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서 잠자리를 보곤 다리가 넷이려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잇고.” 처용이 달 밝은 밤에 늦게까지 놀았다고 하여 아내의 간통 현실의 원인 제공을 제 탓으로 돌리고 이미 빼앗긴 걸 어찌하겠느냐며 체념하지만 역신과의 대결에서 패배로 끝나게 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신의 마음을 감동시켜 승리하게 만들었다는 처용설화에는 현실의 갈등에서도 뒤로 물러서는 미덕과 폭력 앞에 춤과 노래로 대처하는 여유가 나타나 한국인의 심성과 지향 가치를 알게 해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2022년 수능 시험문제로도 출제되었던 처용가가 작금에 와서 관심을 끌 수 있는 건 창궐하는 역병의 물러감과 어떠한 난관에도 분노보다 여유로 대처하는 민족의 지혜가 필요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처용가의 처용이 누군가. 삼국유사의 망해사조에서 통일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렸다.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왕 앞에 나와 인사했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1명이 왕을 따라 서울에와 정사를 보좌했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라는 설이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벼슬을 내렸는데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이 사모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처용이 없는 밤에 그의 아내를 찾아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에 ‘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처용이 물러나자 역신은 모습을 드러내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 밤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를 물리치고 경복을 맞아들였다는 전설이다.

고려 시절 처용은 이 같은 심성으로 질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처용가는 질병을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한다.

코로나19와 오미크론 창궐로 하루 수 백명이 사망하고 수 십 만명이 확진되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현대판 처용가를 다시 불러보고자 한다.

현대의학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번져버린 코로나19의 확진은 단순한 병상 부족으로 끝날 수준을 넘어섰다.

K방역의 영웅이라며 추켜세우던 질병관리청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다던 문재인 대통령은 슬그머니 말문을 닫았다.

생업을 뒤로 한 채 방역 지침을 준수하던 서민들은 이제 더 버틸 여력도 없이 가뭄에 콩 나듯 한번씩 지급하는 재난보조금에 길들여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지만 최근 지급하는 확진자의 생활안정자금은 1인당 1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필자도 지난 15일 관할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하러갔더니 보건소에서 문자를 받아야 지급 가능하다는 안내를 듣고 보건소에 문자 발송을 신청했더니 밀린 사람들이 많아서 순차적으로 처리한다는 멘트다.

신청해도 4개월 뒤에야 본인 명의 통장으로 지급된다는 10만원의 생활안정자금, 만약 단어대로 현재 물가를 계산한다면 4개월 동안 버티다가 10만원을 받아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비현실적이고 달라고 해야 받을 수 있는 탁상행정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문득 성급한 처용가가 떠오른다.

밤늦도록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에 와보니 안방 침대의 이불 밖으로 다리가 넷이 삐져나왔는데 둘은 마누라 다리고 둘은 낯선 사내 다리라.

이것저것 가릴 것도 없이 거실 구석에 세워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개 패듯 두들긴 다음 냉장고에 냉수라도 들이키려고 주방에 오자 마누라가 요리하느라 손이 분주하다.

순간 상황 판단이 안 된 남편을 쳐다보며 하는 말 “여보 친정아버지랑 엄마가 오셔서 안방에서 주무셔, 등산 다녀오면서 들르셨는데 몹시 피곤하신가봐”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평소 처용가를 심독하는 남편은 “어째 이런 일이”하며 땅을 쳤다는 전설이다. 오늘날 오죽하면 고려 적 처용가를 인용하며 국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겠는가.

대체로 보아서 나라가 융성하고 백성이 안녕한 국태민안, 태평성대를 이루려면 모이지 않는 무형의 국가와 보이는 국민이 함께 공감대를 세워 기대되는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하마평부터 취임을 준비하는 국가의 지도자를 놓고 갑론을박은 물론 대규모 군중집회나 모의하고 있으니 이 무슨 망상이란 말인가.

뽑았으면 일단 시켜보고 그 나물에 그밥 일지 전보다 못하거나 나을지 두고 볼 여지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절반의 지지로 당선되었기에 뜻이 다른 절반의 민심을 추스르는 게 덕망 있는 지도자의 처신이다.

절반의 힘으로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은 마치 한쪽 바퀴가 굴러가는 수레에 짐을 실은 것이나 진배없는 형국이다. 어찌해야 할까.

국정의 수장이 마치 개인의 권위나 영광으로 여겨진다면 이는 잘못 채워진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소신을 갖고 누가 뭐라 하든 미래지향적인 대한민국을 구상하는 강단과 즉흥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결단력이 필요한 시기다.

자칫 이불 밖의 다리만 보고 장인·장모를 개 패듯 두들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설속의 처용을 불러 질병에 신음하는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달라고 졸라야겠다.

그것도 안 되면 신라의 경주 밤을 지새운 당시의 술자리를 재연하여 처용의 부인을 유혹할 역신을 불러보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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