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술 취한 대나무, 죽취일
[덕암칼럼] 술 취한 대나무, 죽취일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6.1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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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중국의 농업백과사전인 제민요술의 기록을 인용하자면 매년 음력 5월 13일을 ‘죽취일’이라 불렀다.

죽취일은 우리나라에서도 1843년에 편찬한 유만공의 세시풍속에도 수록된 바 있으며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그믐까지 다양한 세시풍속이 월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죽취일이 포함되어 있다.

대나무 생일로도 불리는 이날은 대나무를 심으면 대나무가 반드시 잘 살고 무성한 고로 대나무를 심는 자는 필히 이날 한다고 적혀있다.

죽취일은 대가 물을 좋아하므로 비가 온다는 기상청의 예보에 따라 준비했건만 역시나 오보로 메마른 이식에 물 퍼 나르느라 진땀을 뺐다.

여기서 죽이란 대나무이며 취할 취에 날일 자를 쓰니 대나무가 취하는 날이란 뜻이다. 1년에 단 하루인 이날은 대가 취해서 어미 대에서 새끼 대를 잘라내도 아픈 줄 모르고 어미 곁에서 멀리 옮겨 심어도 어미 곁을 떠나는 슬픔을 알지 못하므로 이날 옮겨 심는다는 속설이 있다.

남쪽지역에서는 죽취일을 단오제보다 더 큰 명절로 꼽았다는 기록이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마을주민의 축제로 삼아 대나무를 심고 죽엽주를 마시며, 화전놀이와 폭죽놀이로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송오죽이라 하여 정월에는 소나무를, 5월에는 대나무를 옮겨 심는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5월에 물이 잘 오르는 때라 대나무를 이식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1800년 11월 정조대왕의 국상이 마무리된 후 나라에 큰 소용돌이가 일었다. 정조의 탕평책으로 잠잠하던 정국에 피바람이 불었다.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 지금의 포항으로 유배에 처해졌다. 다산 정약용의 시문에도 “술 취한 대나무는 언제쯤 깨려나. 제 뿌리가 옮겨져도 대나무는 모른다네.

다만 가지와 잎이 다칠까 걱정할 뿐 뿌리째 옮겨 가리라곤 생각지 못하네”라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는 정약용이 남쪽으로 유배를 가서 지은 시로 자신의 신세를 마치 죽취일에 옮겨지는 대나무에 빗댄 것이다.

대나무는 한번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옮겨 심으면 죽고 만다. 그런데 일 년에 딱 한번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 날이 있는데 그날 옮겨 심으면 대나무가 잘 산다고 하고 그날이 음력 5월 13일이다.

대나무는 강직함과 청렴함의 상징인데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매일 긴장하면서 살다가 이날 만큼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술에 취한다는 전설이다.

대나무는 마디라는 절도가 절묘하게 디자인 돼 옮겨 심기가 무척 까다롭지만 이날만은 술 취한듯이 몽롱해져서 옮겨 심어도 잘 살아난다고 한다.

곧게 자라기 때문에 지조 있는 선비의 대쪽 같은 기질은 절개와 정절을 상징했다.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득도를 뜻하기도 하고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겨 무속인 집에는 대나무를 세워두기도 하며 동양의 수묵화 소재는 물론 고려나 조선의 화병과 주전자 등 도자기에도 대나무는 다양한 형태의 문양으로 등장했다.

동북아 지역의 정신문화에도 크게 기여한 대나무를 송나라의 차군이라는 시에서 인용하자면 밥 먹을 때 고기반찬이 없는 것은 수척해질 뿐이지만 집에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속물이 된다고 한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계절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리 깊은 의미를 담은 죽취일은 대한민국 대나무의 군락지인 전남 담양군에서 출발했으며 죽취일은 고려초부터 1,000년 이상 이어져 오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1923년 강제 폐지됐으나 지난 2005년 대나무문화연구회에 의해 80여 년만에 부활된 바 있다.

이후 5년 동안 중단돼 오다가 2010년 다시 부활됐다.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숲을 이루던 대나무가 서기 2022년 6월 11일, 단기 4355년 음력 5월 13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서 치러졌다.

전날 전북 전주에서 밤새 화분 작업을 마친 대나무 500주가 대형트럭에 실려 새벽녘에야 육지 같은 섬마을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굴삭기와 인부들의 분주한 노력끝에 오후 늦게야 모든 나무들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운반 도중 혹여 술이 깨면 정든 전주가 그리워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란 염려에 지하수를 끌어올려 흠뻑 물을 주고도 부족해 막걸리를 곳곳에 부어주었다.

시국이 좌충우돌하고 국민들의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초대한 대나무들의 입성을 환영하며 서해안 섬마을의 죽취일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밤하늘 별빛에 대나무 끝자락이 걸리면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고 또 한쪽의 달무리에 밤바람이 흔든 댓잎이 춤을 추면 대나무도 취하고 필자도 취하니 탁자에 쌓이는 술병은 늘어만 갔다.

새 임금이 새 나라를 만들기를 바라며 백성이 먹고 사는 걱정없이 사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날 아침 새로운 둥지에 늘어선 대군들에게 아침 생수를 뿌려주며 밤새 안부를 물었다.

어쩌다 하나 둘씩 시들어진 대군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살아남아 첫날밤 낯선 객지의 정착에 새 꿈을 꾸려는 듯 가느다란 대줄기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연일까. 신입 대나무 주변에 수십 년전부터 울창한 소나무들이 군락으로 텃세를 부리고 있으니 380년 전인 1642년 윤선도가 전남 해남에서 지은 산중신곡의 오우가가 떠오른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랴.” 때가 달라 덕암 칼럼으로 세상사를 적으려 하니 ‘오우가’ 말고 별을 더해 ‘육우가’ 되어 수십 년이 흘러 후세들의 삶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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