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식민지의 희생 위안부
[덕암칼럼] 식민지의 희생 위안부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8.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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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다. 찌는 듯한 폭염과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24절기 중 14번째인 처서가 이름값을 한다.

처서란 말은 더위를 처분한다는 단순한 풀이도 있지만 모기가 입이 삐뚤어진다는 예화가 있어 소개한다.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만났다.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 것을 본 귀뚜라미가 놀라서 묻는다.

자네 입이 어찌 그 모양인가? 모기 왈 “사람들이 나를 잡는다고 자신의 허벅지도 때리고 심지어 뺨도 치는 꼴이 너무 우스워 웃다보니 이렇게 입이 찢어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모기가 귀뚜라미에게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톱을 뭐 하러 들고 다니느냐고 묻자 귀뚜라미 왈 “긴긴 가을밤 홀로 밤을 새우는 청춘 남녀의 애간장을 끊으려고 들고 간다”고 답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가 쑥 들어가고 대신 귀뚜라미가 밤새 운다는 것을 표현한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요즘처럼 돌아온 싱글이나 독신자들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귀뚜라미의 등장은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할 만큼 과거의 기록은 중요하고 기록을 바탕 삼아 현재를 꾸려가는 것이며 현재의 발전이 있어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보자.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44년 8월 23일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진다. 문화재 약탈에 화폐개혁, 군대 해산도 모자라 글과 말까지 일본어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게 하고 온갖 침탈의 나날을 보내고 전쟁터에 필요한 것이라면 놋수저까지 몰수해 가던 시절이 있었다.

더 빼앗을 게 없었던 일본은 끝내 조선의 여성들에게 악마의 눈길을 돌렸다. 전쟁터로 내몰린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일명 위안부 동원령이었는데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되어있던 노동력이 점차 부족해지자 여자 정신근로령을 제정해 여성노동 착취를 시작한 것이다.

말이 노동력이지 만 12~40세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불응하는 사람은 각종 제도를 명목 삼아 강제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일부는 광산, 토목공사장 등에서 단순 노동을 하거나 전선에서 사무직으로 동원되기도 했지만 사실상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이용하기 위해 위안소로 끌려간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연령을 볼 때 요즘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해당되었으니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하루에도 수 십 명의 군인들에게 성폭행 당하는 날들을 보낸 것이다. 부모님 슬하에서 온갖 사랑받으며 호기심과 함께 봄꽃만 봐도 가슴 설레는 사춘기를 보내야할 소녀들이 감당해야 할 상황치고는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나라 팔아먹은 대가치고는 참으로 고약하다. 지금의 중국은 지구의 중심이라 할 만큼 거대한 나라지만 한때 일본에게 온갖 침략을 다 겪은 나라였다. 중일전쟁후 일제는 조선에 대한 무제한적인 물적·인적 수탈을 강요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전쟁에 미친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주변 국가들을 가릴 것 없이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3년 10월 8일 국민징용령의 시행과 관련된 여자노무의 대체이용 등을 규정했는데 이는 1944년 8월 23일 발표한 여자정신근로령의 공포·시행에 대한 신호탄인 셈이다. 당시 법령을 살펴보면 국민직업 능력 신고령에 의해 만 12~40세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정신대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정신 근로령서를 발급하여 부녀노동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가고 안 가고의 선택은 처음부터 없었다. 불응하는 자는 취직령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그래도 불응하면 국가 총 동원법 제32조에 따라 처벌했다. 당시 법령에 따르면 여자도 국민동원계획에 의한 상비요원으로 정해졌고 기혼녀와, 불구·병약자를 제외하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여성에게 적용되었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성정신대도 노무동원의 한 형식이므로 신분은 피징용 여성노무자라야 했으나 현실적으로 동원될 당시의 표면상의 신분일 뿐, 사실상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들이 여자정신대 또는 여자 애국봉사대 등의 명칭으로 동원된 다수의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투입했기 때문에 여자정신대에 대한 호칭 자체가 마침내는 종군위안부를 뜻하는 경우로 바뀌게 된 것이다.

만약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한국 땅에 다시 위안부 동원령이 내려져 초등 5학년생부터 40세 미만의 여성들이 강제로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희생양이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물론 그런 일들이 두 번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당시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의 여인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원해서 간 적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과와 반성없이 버티는 게다짝의 후손들이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어쩌랴, 이것이 그들의 한계인 것을, 과거 조선이 전기도 없이 촛불켜고 살 때 태평양을 건너가 진주만을 공습했던 대국이었다.

지금도 글로벌 시대 금융대국으로 성장했으면서 하는 짓을 보면 최빈민국가에서나 봄직한 처사를 하고 있다. 이래서 일본은 두 번 다시 과거의 화려한 대국으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이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볼 때 한국 또한 식민지로 가고도 남을 만큼 애국관의 허술함과 도덕관의 상실이 국가관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민족 대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부모님 안 찾아가기 운동을 벌였던 촌극이 어제 일처럼 기억된다. 반면 온 관광지에 인파가 몰려도 어째 코로나19는 공기 좋고 부모님 계신 시골만 찾아갈까.

나라가 잘 되려면 국민들의 정신상태가 반듯해야 하고 그 길에는 각자의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근본이자 당연한 것임을 모두가 공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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