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들
[덕암칼럼]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들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9.1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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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조수 간만의 차를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전국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서해안의 섬 아닌 섬 인천 영흥도다.

서울과 수도권이 가깝고 동선이 짧아 연간 400만 명이 다녀가는 영흥도는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다. 약 300개가 넘는 펜션과 280곳이 넘는 식당, 고깃배들이 모여 있는 진두항을 비롯해 낙조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경리, 십리포해수욕장의 풍경은 어촌마을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기도 하다.

영흥도는 21년 전만 해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2001년 11월 15일 영흥대교가 개통됐고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섬 자체가 관광지다 보니 다양한 요소들이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해군 전적비다. 6·25전쟁 당시 영흥도에서 발생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적비로 해변에는 해군 참수리호 263호정(퇴역함)이 정박해 있다.

유효 사거리 2km, 탄약 2.3톤 발사속도 약 1,500발, 1978년 대우조선해양에서 선보였던 참수리호는 대간첩 작전에 필수적인 역할을 해 왔다. 서해 제1연평해전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던 참수리호는 영흥도 관광객이라면 대부분 한번쯤은 기념 촬영 하는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다. 시간을 72년 전으로 돌려 영흥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함께 짚어보자.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침 4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남하하는 국군과 피난민 행렬은 끝이 없었다. 대세가 기울어진 전쟁의 판세는 미국의 주도하에 한국인 34만 명을 서사모아로 이주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는 것을 준비하는 등 사실상 남한은 멸망의 벼랑 끝에 있었다.

소련제 탱크로 무장하고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북한과 남의 나라에 파견되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연합군의 대립은 갈수록 인명피해가 극심했고 결국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정하는 비극의 종말이 보이는 듯했다. 인산인해가 된 부산, 같은 해 12월 15일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철수한 1·4후퇴는 무기를 버리고 사람을 선택한 인류애가 지금까지 거룩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당초 이 작전은 극비밀리에 준비된 군사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극동군사령부가 인천100-B, 군산100-C, 주문진100-D 등 3가지 시나리오 중 인천100-B가 선택된 것이었다. 날짜는 만조가 가득한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중 가장 최적의 날짜로 9월 15일이 선택됐다.

9월 9일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된 인천상륙작전은 9월 5일부터 북쪽의 평양에서 남쪽으로는 군산까지 길게 해안선을 폭탄 투하로 대대적인 공습을 펼쳤다. 9월 12일 영국군이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에도 삼척 일대에 대량의 폭탄을 퍼부었으며 D-DAY가 임박한 12일에는 월미도에 대한 포격이 이어졌다.

9월 15일 오전 2시 정각,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3년 전 261척의 군함과 7만 명의 연합군이 먼저 월미도를 점령했고 이어 인천시를 향해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펼쳤다. 성공 확률 5,000분의 1. 맥아더 장군의 집요한 주장으로 기적은 성공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포성은 멈췄지만,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보이지 않는 영웅들은 지금와서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 그러했고 북한군의 정보를 교란하기 위해 노력한 포항의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했다. 이명준 대위가 이끄는 어린 학도병들의 무모한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은 성공했다. 평균 나이 17세, 학생으로 치자면 고등학교 1학년인 셈이다. 2주간의 훈련, 772명의 고귀한 젊은 청소년들은 그렇게 총알받이나 다름없는 전쟁터의 희생양이 됐다. 여기까지는 많은 국민들이 영화나 서적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북을 합쳐 300만 명이 사망한 전쟁,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에는 해군특수첩보대가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서울, 수원까지 잠입하는 일명 엑스레이 작전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항공 촬영이나 통신으로는 알 수 없는 적의 모든 동태와 장비, 병력배치를 이 첩보원들이 목숨 걸고 파악해 정보를 제공했다.

임무수행 중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영흥도는 피바람이 불었다. 대원들을 피신시키고 최후의 일각까지 적과 대치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임명래 중위, 홍시욱 하사,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누설될 가능성을 알고 스스로 자결을 선택했다. 위대한 영웅의 순국이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소중한 동기로 남았다.

켈로부대로 불려진 이들은 어민으로 가장하여 서해안 도처에 설치한 기뢰의 위치도 찾아냈고 최종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선택했다. 인천상륙작전,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 이어 영흥도에서 펼쳐진 엑스레이 작전의 주인공들을 단편 영화화하려는 움직임이 영흥도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

앞서 거론한 참수리호의 명예함장으로 지금까지 7년째 관광안내를 자진봉사하고 해군 전적비를 17년째 지켜온 영흥도 지역주민 변승평씨(81세·남)는 이렇게 말한다. “숨은 영웅들이 지금이라도 후손들에게 재조명되어 국가의 소중함을 공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변승평 명예함장은 지난 9월 6일 엑스레이 작전의 영화화를 위해 (사)한국영화인총연합회 인천광역시 옹진군 지부를 인준 받았다.

지부장으로서 남은 생애 가장 귀한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나이와 열정의 무관함을 보여 주었다. 전쟁 중에 영웅들, 전쟁이후 후손으로서 도리를 다하겠다는 결의는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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