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참을 인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덕암칼럼] 참을 인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1.16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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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살다보면 내 마음 같이 일이 풀리지 않아 분노가 치밀고, 그로 인해 우발적으로 사고를 치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사회적으로 보자면 층간소음을 견디지 못한 살인사건도 벌어지고 갈등과 불화가 커져서 방화사건도 발생한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일상 속에서도 이 같은 우발은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소지가 있으며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다면 교도소는 만원일 것이고 힘없는 사람은 숨도 못 쉬고 살 것이다.

뿐일까 죽을 만큼 힘들다고 아우성쳐서 돈을 빌려주고 짐을 들어주었는데 적반하장으로 발뺌을 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당연히 한번은 당하지만 다음에 같은 경우가 있다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오늘은 세상을 살면서 어디까지가 양보와 이해의 상식선이며 어디까지가 선을 그어야 하는 선인지 함께 돌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쓴다. 먼저 필자 개인의 경우를 경우로 놓고 보자면 적어도 열 번은 극단적 선택을 했었고 열 번은 완전범죄를 꿈꾼 적도 있었으며 분노가 극치를 달릴 때 살생부를 적어두고 언젠가는 갚아야지 하는 절치부심의 날들이 있었다.

물론 그럴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지 못했다. 만약 그러한 과정에 인내와 자비와 관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독한 시련이 찾아와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 듯 상처가 날 때는 생살을 파는 듯 아프지만 굳은살이나 딱지가 몇 번이나 앉았다 떨어지고 새카맣게 탄 속이 다시 새살이 몇 번이나 난 다음에는 그만큼 마음의 폭도 깊어지니 모든 분노의 원인도 삭이기만 한다면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육신과 마음은 하나여서 훈련하기 나름이며 평소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험한 일을 하려면 쉽지 않은 것처럼 아무 어려움도 겪지 않으면 작은 파도에도 휩쓸려 중심을 잃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죄 없는 가족들까지 죄다 저승길로 데려가는 못난이들이 한둘인가.

필자는 이 글의 공간을 빌려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 더 극한 상황과 견주면서 이겨내는 지혜와 그런 의지가 모여질 때 찬란한 미래가 반드시 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치 천년바위에 뿌리내린 외로운 소나무마냥 꿋꿋이 사는 독자님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각설하고 오늘은 1995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국제 기념일 관용의 날이다. 매년 11월 16일인데 칼럼 소재가 빈곤해서 선택했다기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각박한지라 삭막한 사회분위기에 단비가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글을 남긴다. 정치권도 그러하거니와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그러하고 우발적 사고가 잇따르는 상황이 그러하다.

자고로 관용이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인데 대표적으로 종교를 두고 배타적 공감대를 갖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선거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민주 정치의 기본 원리인 다수결의 원칙은 소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함에도 일체 배제되고 마는 것이 대립을 불러오고 있다.

한때 대선을 두고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가 치열한 한판 승부를 마친 지금도 국민들은 언제부터 두 후보의 광팬이 되었었는지 선거가 끝난 지금도 으르렁 대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순방길에 비행기가 추락하라고 기도하는 종교 구성원이 있는가하면 이 같은 기도가 제3국에서 볼 때 얼마나 국가적 망신으로 비춰질지도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모두가 관용의 부족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망언이다. 맹자는 인간의 기본윤리로 제시한 인·의·예·지·신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인을 우선시 했다. 인이라는 한자는 두 가지의 짐을 진 사람의 모습으로 남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어떻게 살아야 똑바로 살까. 논어에서 나오는 관용의 기준을 몇 글자로 줄이자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고 언행에 신중하고 열심히 공부하기,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고 편안한 곳에서 자지 않기. 말을 적게 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기, 편 가르지 않고 포악하거나 태만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욕설을 삼갈 것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는 오래전 과거부터 내려오는 말이지만 현대사회에 필요한 것만 골라 본 것이다. 참을 인 자 3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했다. 참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세대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관용은 베풂이자 배려인데 배려를 권리로 아는 사람은 관용을 베풀 가치나 이유가 없으며 관용의 낭비가 종래에는 다음 사람에게 베풀 여지마저 상실케 하는 것이다.

무조건 다 베풀고 용서하고 경우도 없이 이해하라는 것은 아니다. 손익을 떠나 요즘같이 살벌한 시기에 관용은 참으로 요긴한 요소이자 가뭄에 단비가 될 것이지만 이 또한 사람 봐가며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 용서하고 베풀면 법이 필요 없고 검사, 판사, 변호사도 실직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소송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과거 같았으면 주먹질 몇 번하고 말 일도 법으로 한다. 대화나 타협보다는 일단 민형사상 소송을 걸고 나면 상대방이 어떤 방식이든 심적 부담을 갖고 합의를 해오기 때문인데 과연 그럴까. 승소하든 패소하고 항소를 하든 법으로 하고 나면 인간관계는 봉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인가 법 좋아하는 사람 법으로 망하고 종래에는 모든 사물이나 인간관계를 대법원 판례로 견줘보는 인간이 될 공산이 크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서적 중에 착한 병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착한 사람만 걸리는 착한 병은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거나 작은 죄의식에 스스로 함몰되어 자신을 들들 볶는 경우인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게 남과 나를 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혼자 꿍꿍 앓아 속 골병들다 어느 순간 폭발해서 감당도 못하는 사고가 나기보다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바로 관용의 낭비를 줄이고 세상사를 잘 풀어가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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