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나라 귀한 줄 알아야
[덕암칼럼] 나라 귀한 줄 알아야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1.1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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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하늘 위와 아래인 천신계와 인간계에서 자신이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다. 이런 말이 현대사회에서는 하늘아래 땅위에 내가 있어야 우주가 있다는 말로 통용되고 있고 일각에서는 타투의 문양이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문구로도 사용되고 있다.

옛말에 “남의 염통 썩는 것은 몰라도 내 손톱 밑에 가시는 아프다”했다. 자신의 몸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으며 아무리 존경하고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크다 한들 자신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 귀한 몸을 아낌없이 나라에 바친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작금의 시대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면 과거에는 있어야 하고 현대에는 없는 게 당연한 것이며 그때는 목숨이 아깝지 않고 지금만 아까운 것일까.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은 귀하고 다치면 아프고 살고 싶은 본능은 당연한 것일진대 어쩌다 구국의 결단이 그때만 있었고 지금은 헌신짝보다 못한 나라가 되었을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이 땅에 다시 포성이 들리고 남북한이 전쟁을 하거나 외국의 군홧발이 산천초목을 짓밟는다면 과연 누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까. 지금같은 사회적 분위기라면 너도나도 사재기나 가까운 항구로 줄행랑을 치기 바쁠 것이다.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 같은 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 할지 독자들도 스스로 알고 커가는 자녀들에게도 한번쯤 넌지시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매년 11월 17일 정한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는데 여기서 명칭 된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가 순국한 인물들을 말한다.

본명은 을사조약인데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늑약으로도 불린다. 일본은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1905년7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조약을 강제하여 체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과 영국이 한국의 식민지화에 동의한 것이므로 군림은 일본이 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그 과정에 공범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고종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정 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 법부 대신 이하영은 소극적 반대, 학부 대신 이완용과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이 찬성을 하면서 을사조약은 반 강제로 체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36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략과 수탈, 강탈이 한민족을 들들볶았던가. 누구는 목숨 걸고 지킨 나라를 누구는 일본 앞잡이가 되어 대대손손 호의호식을 하며 지금도 정계, 재계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이러니 누가 순국열사 대열에 줄 설 것인가.

뒤늦게 1965년 박정희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9조를 통해 이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상호 확인했다. 그 이유에 대해 국새와 외무대신의 관인은 훔쳐서 날인했다는 고종의 증언이 존재했고 서명은 다음날인 18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 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한규설 참정 대신이 통곡했고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누구는 죽어도 안 된다고 울부짖을 때 누구는 모든 책임을 고종에게 전가하면서 찬성했다.

이런 매국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잘살고 있다는 것은 국치라 할 수 있다.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가결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조약도 조약일까. 전문에는 한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의 공통이해를 이해, 한국이 부강해질때까지 식민지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가 잘살고 그 후손들도 잘살고 나라 잃은 백성들은 처참한 대가를 치르기 시작한 날이 오늘이다.

그리고 5년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확실히 멸망했다. 필자는 순국선열의 범위에 국권회복을 위해 호국정신으로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일조약을 반대하고 을사5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윤치호 선생은 당시 나라꼴이 이렇게 되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치, 무능,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의 갈등 속에 애먼 국민들만 피폐해짐을 주장했다.

뒤늦게 고종이 밀사를 보내 국제사회에 한일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이또한 일본에게 폐위의 명분만 주었을 뿐 내부적인 첩자들의 소행으로 불발에 그쳤다. 국권찬탈, 그로 인한 망국의 서러움. 그러한 국민들의 어려움은 110년이 지난 지금도 껍데기만 화려했지 알맹이의 어려움은 유사한 형국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애국자들의 행보는 끝이 없었다. 우연일까 그로부터 22년 뒤인 1932년 9월 20일 밤 8시과 11월 17일 2차례에 걸친 대 일본 항일투쟁은 지금도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항일투쟁에서 숨진 독립군의 희생은 오늘날 다시 상기하고 추모하며 고마움을 가져야 할 일이다.

한국독립군과 중국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이 연합해 하얼빈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이 전투로 독립군의 존재는 국제사회에서 크게 부각됐다.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지청천과 부사령 김창환을 비롯해 약 500명이었고 중국의 항일군을 포함 약 3만명이었다.

당시 쌍성보에 주둔 중이던 약 3,000여 명의 만주국군과 소수의 일본군을 습격해 2,000명을 생포하는 전승을 거두었다. 1차는 성공했지만 11월 17일, 그러니까 90년 전 오늘 2차 전쟁이 시작되면서 성안에 있던 일본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했다. 열받은 일본군은 폭격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이후 한중 양 민족의 공동전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어쩌면 일본을 상대로 중국과 한국은 아군이었다. 이래서 적의 적은 동지라 했던가. 세월이 흘러 순국한 애국열사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온 이 나라에서 우리 후손은 어떤 애국을 하고 있을까. 서로 할퀴고 싸우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말꼬투리를 잡아 정당간 대립만 세우고 국민들은 천지도 모르고 같이 부화뇌동하는 형국이니 이쯤되면 미안함을 넘어 석고대죄해도 시원찮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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