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일관계 재정립, 동북아시아 평화의 선도(先導), 어리석은 대륙봉쇄령!, 이순신 12척과 기시다 후미오 가미카제(가미가제)의 화해(和解)!!
[사설] 한일관계 재정립, 동북아시아 평화의 선도(先導), 어리석은 대륙봉쇄령!, 이순신 12척과 기시다 후미오 가미카제(가미가제)의 화해(和解)!!
  • 이찬엽 논설위원 pinetree0516@hanmail.net
  • 승인 2021.11.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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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엽 논설위원
▲이찬엽 논설위원

미국은 한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를 “간 보기 위해” 존 오소프(34세, 미 조지아주·민주당, 아프리카 중동 탐사보도 언론인 출신, 에코시스템 선두주자) 연방상원의원과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일본을 거쳐 급파했다.

오소프의 주된 목적은, 친환경 배터리와 수소 등 에코 비즈니스 및 미국에 대한 “80조 투자”였고, 크리튼브링크의 주된 목적은, 한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누가 미국의 입맛에 맞는가”에 대한 확인이었다.

여당과 야당 후보가, 그들을 “대하는 관점”이 확연히 달랐다. 윤(尹) 후보는, 안보와 그로벌 이슈까지 포괄하는 확고한 동맹을 강조하면서, 특히 기후협약, 첨단디지털 테크놀로지, 보건문제 등에 대한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

조 바이든이 급파한 이들은 “하석(下席)”에 앉고서도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더욱이,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말에, “미국과 코드가 맞는구나”라는 웃음을 지었다.

반면, 이(李) 후보는,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 태프트 협약”을 승인했기 때문이고, 남북의 분단도 일본에 의해 분할된 게 아니라 전쟁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전쟁의 원인이 됐다는 점은 전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밝히면서도, 미국의 지원 협력 때문에, 전쟁에 이겨 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고, 경제 지원 협력 덕에 오늘날 유일하게 개발도상국 나아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중에서 경제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이뤘다는 다소 탄력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미안보동맹을 넘어서서 군사·경제교류 협력을 포함한 포괄적인 관계 확대 구축을 희망하면서도 “이산가족 상봉 관련 법안” 및 “인도주의적 관심”을 촉구했다. 종전 여당에서의 주된 기류가 아닌 발전적 모색이었다.

미국과의 군사 공조의 강도에서는, 두 후보의 견해가 갈렸다. “여는 동맹”, “야는 혈맹”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점령군”으로 생각하고, 한일합병 및 한반도 분단책임을 “미국이 져야 한다”는 것에, 워싱턴의 백악관은 매우 우려했고, 이번 방한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즉, 외교파트너로서 누가 더 나은가를 “첨병”처럼 살펴보러 왔다. 바이든은 이미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든의 속내는 “무기 수입과 미국에 대한 투자”였다!! 

더구나, 오소프 상원의원은 거들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미국 젊은이들이 배워야 하고, 실제로 양 국가의 젊은이들은, 인권과 환경보호 등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미스터선샤인)의 애청자임을 통해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갖고자 했다. 세계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이야말로 백신도 기꺼이 사주고 주한미군 주둔비는 물론, 미국 무기 4대 수입국으로서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이게 진정한 우방 아닌가??

현 정부는 “친중(親中) 배미(排美) 반일(反日)”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세계정세를 읽지 못했고, 역사에 발목을 스스로 잡혀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소미아 파기, 미국과의 불협화음은 큰 손실로 이어졌다. 정권교체‧정권심판으로 이어졌다!!

관련하여, 최근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발전적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일본과의 관계는 소원하고 멀다. 헌데, 이(李) 후보의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책임이 미국과 일본에 있다는 말은 기시다(일본 100대 수상) 정권과의 갈등을 예견케 한다.

현 수상 기시다는 전 수상 아베와 자민당 내 간사장 인선 문제로 갈등을 빚은 적이 있고, 2인자 하야시(외무상)는 친중파이면서 한국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한 “연한파(硏韓派)”다.

한일외교에서 까다로운 역할로 주목된다. 한국은 지금처럼 “외톨이 외교”를 하면 미래는 없고, 그건, 후손들에게도 “불행”이다!!

그 불행은, 친중(親中)을 통한 일본에 대한, 제2의 “대륙봉쇄령”에서 시작됐다. 즉, 이는, 1803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교전, 1805년 제3차 대불동맹(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결성, 영국의 트라팔가해전 승리, 반면 유럽대륙에서 프랑스 승리(나폴레옹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 패퇴), 신성로마제국 해체, 프로이센의 굴욕적 틸지트(Tilsit) 조약체결, 구체제(앙시앵 레짐) 동요‧붕괴, 1806년 대륙봉쇄령(베를린칙령), 영국과 유럽대륙의 통상 금지,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몰락의 역사로 흘러간 것과 흡사하다.

즉, 현 정부는 중국과 연합, 일본을 “대륙봉쇄”하듯 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외교 빈국이 되었다. 외교에서 완전한 승리는 없다. 대략 55:45면 외교에서 승리한 것과 같다! 외교에서 연속적 패배는 북(北)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일반적 국교관계를 규정한 조약(기본조약, 1965), 재일교포법적지위협정(1965), 어업협정(1965), 청구권협정(1965), 문화재협정(1965), 한일항공협정(1967) 한일신어업협정(1999) 사회보장협정(2005) 한일원자력협정(2012) 한일비밀군사정보보호협정(2016: 지소미아) 등을 조인한 바 있다.

특히, 한일 협정(기본조약)은, 박정희 정부가 일제의 식민지배 피해 배상문제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 비판대에 올랐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 중 제5항인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대판 2013다61381).

또한,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 행사를 인정,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신일철주금(피고)이 각각 1억원씩을 배상하도록 확정했고,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신일철주금의 대한민국 내 자산을 압류한 바 있다(2019). 이제라도 청구권협정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

기본조약의 문제점은, 일본의 불법적 침략과 위법한 지배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하는 것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처음(당초)부터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일(1948년 8월 15일)부터 효력을 상실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체제: 1951년 9월) 즉, 연합국과 일본 간의 평화조약을 기초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일본 군정기 종말과 일본의 주권회복에 힘입은, 일본의 오만방자함에서 비롯되었다.

이건, 한국 지배의 불법성을 합법성으로 둔갑시킨 처사다!! 1993년 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수상,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수상,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고이즈미·김정일 평양선언), 2009년 9월 간 나오토 수상의 사죄는 거짓이었다!!

게다가, 청구권협정과 관련하여,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중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외상 간 막후 협상이 문제 된다.

당시 오히라는 독립축하금(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제시했으나 김종필은 6억 달러를 제시, 합의도출에 실패한 바 있다.

일본은 독립축하금,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해석하여 견해를 달리했다. 김종필도 나름 역할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독립축하금이라니 말이 되는가!!

협정내용은, 일본은 한국에 10년에 걸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연이율 3.5%, 7년 거치를 포함하여 20년 상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청구권협정에 의거 10년간(1966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으로부터 5억 달러가 입금되었다.

그러나, 이는,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문제가 있고, 경제적으로 일본 자본의 한국 유입으로 부패 고리 형성, 노동집약 산업으로의 전락, 그에 따른 일본 독점자본에의 잠식‧종속이 문제 되었다!!

나아가, 어업협정파기와 1999년 9월의 신어업협정은,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선포로 말미암아 독도 주변이 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되면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타격을 주었다.

종전의 어업협정은 12해리 수역을 배타적 관할권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국제사회가 급변하는데도, 이에 합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 인해, 해양대국의 꿈은 좌절됐고, 넓은 바다를 빼앗겼다!

한편,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일본보다 몇 배 크다. 한국은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마지노선(최후방어선)이다.

이는, 현재 주둔 중인 미군이, 독일 50,000여명, 이탈리아 10,000여명, 영국 9,000여명, 하와이주 35,000여명, 일본 40,000여명, 한국 28,000여명. 알래스카주 18,000여명, 괌 3,000여명 인데, “주한미군의 역할”은, 북한의 핵 공격은 물론 중국의 패권주의를 방어하는 군사적‧이념적 의미를 갖는다.

관련, 한국과 일본 및 대만을 잇는 “신 트루먼 독트린”이 부상하고 있다. 이 독트린은,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협공에 약한 국가이고, 따라서, 이 세 나라를 엮어 태평양 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이다. “미국의 실리주의”는 끝이 없다!!

역사를 보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얌체 짓은 계속됐다. 중국과 더불어 한국을 유린하는데 혈안이 되곤 했다.

과거, 일본 총리 가쓰라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제26대 루스벨트의 특사)와 밀약을 함으로써(1905년 7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를 확인하였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1905년 8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받았다. 과거 역사는 외교 문외한, 외교 초보, 외교 무능력에서 기인됐다!! 그럼. 지금은??

과거의 역사 중, 세계 4대 해전 즉, 살라미스 해전(BC 480년, 그리스와 페르시아), 칼레 해전(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 침략), 트라팔가 해전(1805년, 영국의 넬슨과 나폴레옹 전쟁), 한산도 대첩(1592년,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와키사카) 중 최대해전인 한산도 대첩 영웅 이순신이 12척의 전함으로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 것과 2차대전 중 일본의 가미카제가 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고 자살 공격을 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잊히어지지 않는 일이다. 즉, 일본과는 “정신적 한계 상황”이 많다!!

그러나, 위의 상황이 그러할지라도, 일본은 우리에게는 필요악이다. 아니 “다정한 친구”도 될 수 있다. 어두운 과거는 이제 털어버릴 때가 됐다. 따라서, 일본도 청구권협정에 따른 제반 이행을 시급히 해야 한다.

명색이, 일본의 유일한 이웃 나라가 한국 아닌가! 현 정부의 어리석은 대륙봉쇄령은 한국에도 일본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가올 2022년부터는, 양국이 얼굴 붉히는 일은 자제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공동대응할 것은 하고, 협력할 것은 하도록 하자!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앙숙으로만 지낼 순 없다!! 제20대 대통령의 역할이 새삼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찬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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