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산악회, 1981년 창립된 YS계 민주화운동 상징...부활 추진, 1992년 대선 시 민산 회장 최형우(前장관)와 본부장 박태권·서울회장 노승우(前의원) 합의
민주산악회, 1981년 창립된 YS계 민주화운동 상징...부활 추진, 1992년 대선 시 민산 회장 최형우(前장관)와 본부장 박태권·서울회장 노승우(前의원) 합의
  • 정웅교 기자 210ansan@naver.com
  • 승인 2021.12.0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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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27일 박태권 전 충남지사 등 전 민산 임원진들, 최형우 전 민산 회장(전 6선 국회의원, 전 내무·정무 장관) 자택 방문, 민산 부활에 원칙적 합의
- 이날 방문에 민산 전 서울강북협의회장 노승우(13·14대 의원), 전 기획국장 정웅교, 전 청년국장 정상화, 전 직능부국장 한지엽, 전 기획부국장 김천규 등 동행
- 최 전 장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평소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김영삼 정신을 이어받을 최적의 후보라고 확신한다”
- 민산, 1992년 김영삼 후보 당선 위해 전국 15개 광역시도협의회와 268개 시·군·구·선거구·특별지부 결성과 회원 배가운동, 그해 12월 18일 대선까지 회원 270여만 명 달해
지난 11월 27일 최형우 전 민산회장과 전 민산 임원진들이 송덕패를 들고 기념 쵤영(앞줄 왼쪽부터 노승우 전 국회의원, 최형우 전 내무장관, 박태권 전 민산 본부장, 정웅교 전%
지난 11월 27일 최형우 전 민산회장과 전 민산 임원진들이 송덕패를 들고 기념 쵤영(앞줄 왼쪽부터 노승우 전 국회의원, 최형우 전 내무장관, 박태권 전 민산 본부장, 정웅교 전 민산 기획국장, 정상화 전 민산청년국장, 전 민산 직능부국장) (사진=민산 제공)

[경인매일=정웅교 기자] 1980년대 전두환 5공 군사독재정권 시절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 등 야권 인사들이 당시 안기부와 경찰 등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등산모임을 하면서 민주산악회(민산)가 탄생되었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80년 봄부터 81년 상반기까지의 1차 가택연금이 끝난 직후인 1981년 6월 9일 정권의 눈을 피해 몇몇 동지들을 규합하여 산에서 첫 민주산악회 공식 모임을 가졌다.

그후 1982년 11월 민주산악회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는데 고문에 김영삼, 회장에 이민우, 부회장에 최형우·김동영·김덕룡·함기환, 운영위원에 최형우·김동영·김덕룡, 산행대장에 이우태 등을 선임하고 전국 시·도지부와 시·군·구·선거구지회 결성을 추진하기로 하고 전국 조직망을 확대해나갔다.

민주산악회는 YS의 23일간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1984년 5월 18일 DJ의 동교동계와 함께 결성한 정치결사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로 발전했다. 

YS 상도동계 중심의 민주산악회,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의 연합인 민주화추진협의회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양대축이었고 19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신민당 창당의 토대가 되었다.

민주산악회의 전성기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 정주영 국민당 후보 등이 출마한 1992년 대선 기간이었다. 

1992년 민주산악회는 대선을 앞두고 상임고문에 김영삼, 회장에 최형우, 수석 부회장에 황명수, 상임부회장에 김덕룡, 부회장에 서석재·서청원·김동주··신영균·김현규·황병태·이우태 등 14명, 본부장에 박태권을 선임하는 등 중앙본부를 확대하였다.

또 1992년 민주산악회는 전국 15개 광역시도협의회와 268개 시·군·구·선거구·특별지부 결성과 회원 배가운동을 추진해 1992년 12월 18일 대선까지 회원이 270여만 명에 달했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1월 27일 최형우 전 민산회장, 부인 원영일 여사, 전 민산 임원진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민산 제)
지난 11월 27일 최형우 전 민산회장, 부인 원영일 여사, 전 민산 임원진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민산 제공)

1993년 2월 김영삼 14대 대통령 취임 후 김 대통령은 민주산악회가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여러 의견을 받아들여 최형우 민주산악회 회장에게 공식 해산을 지시했고 최 회장은 이를 수용해 중앙본부 사무실을 폐쇄하였다.

민주산악회는 공식적으로는 해산했으나 전국 대부분의 광역시도 협의회와 260여 시군구 지부가 매월 정기 산행을 하며 조직이 가동되었다. 

현재도 민주산악회는 명칭을 그대로 쓰거나 변경해서 활동하고 있는 전국적으로 100여 개 지부, 20여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산악회 출신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이 다수 배출되었다.

지난 11월 27일 박태권 전 충남지사(1992년 당시 민주산악회 본부장, 93년 회장) 등 전 민주산악회 임원진들이 최형우 전 민주산악회 회장(전 6선 국회의원, 전 내무·정무 장관) 자택을 방문하여 최형우 전 회장과 향후 민주산악회 부활과 활성화 방안을 협의하고 부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날 최형우 전 회장 자택 방문에는 민주산악회 전 서울시 강북협의회장 노승우(전 재선 국회의원), 전 기획국장 정웅교(경인매일 서울취재본부장), 전 청년국장 정상화(현 민산동우회 회장), 전 직능국 부국장 한지엽(현 민산 서울시 협의회장), 전 기획국 부국장 김천규(전 민주평통 시흥시협의회장) 등 여러 임원진들이 동행했다. 

최형우 전 회장은 이날 “민주산악회는 5공 군사독재정권 시절, 그들의 간악한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산행을 가장해 산에서 민주세력이 결집하고 민주화운동을 한 단체로 당시 민주화추진협의와 함께 민주화운동 양대 산맥이였다”고 말했다.

최 전 회장은 또 “민주산악회는 1992년 대선에서 300만 가까운 회원들이 김영삼 후보 당선을 위해 헌신적이고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함으로써 1993년 2월 우리나라 최초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산명령을 하셔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매우 섭섭했고 민산 회원들에게 무척 미안했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3년 1월 15일 민산회직자 일동 명의로 최형우 당시 민산회장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근증한 송덕패(사진=민산 제공)
김영삼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3년 1월 15일 민산회직자 일동 명의로 최형우 당시 민산회장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근증한 송덕패(사진=민산 제공)

그는 “민주산악회의 기본 정신은 김영삼 정신이고, 민주화 정신이다. 문재인·민주당 정권은 부동산정책 등 전반적인 국정 실패는 물론이고, 입법부와 사법부, 검찰을 장악해서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최 전 회장은 그러면서 “따라서 우리 민주산악회가 과거 5공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였고 92년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해 헌신한 것처럼, 민주산악회가 다시 재탄생하고 과거 회원들이 단합해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당선시키고 무능하고 반민주적인 문재인·민주당 정권 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평소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현재의 대선 후보들 중에서 김영삼 정신을 이어받을 최적의 후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최형우 전 민주산악회 회장과 박태권 전 본부장 등 임원진들이 민주산악회 부활에 원칙적으로 합의함으로써 민주산악회는 전국 조직을 확대하고 회원을 확보해나갈 예정이다. 

또 민주산악회는 공직선거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정치활동은 일체 하지 않을 방침이며, 선거운동을 할 경우에는 국민의힘 선대위 조직본부 또는 직능본부 산하에 공식적으로 편입돼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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