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봉사
[덕암 칼럼]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봉사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2.0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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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과거 고달픈 시집살이를 참고 지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금지옥엽 귀한 딸을 시집보내려는 친정어머니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을 지내라며 아무리 어렵더라도 잘 견뎌내서 그 집안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각종 장 담그기와 다듬이질을 하며 홍두깨로 칼국수를 해먹던 시절, 포대기로 업고 안고 손목잡고 머리에 똬리를 얹어 물동이를 이고 살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 불과 50년 전이었다.

왜 그랬을까. 3년씩 9년 동안 보고 듣고 말하지 말고 살라는 뜻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보고도 못 본체 들어도 못 들은 체 말하고 싶어도 참고 지내다 보면 온갖 흉허물이 나무의 나이테 그려지듯 무늬만 남기고 마음의 상처는 딱지가 져서 어느새 면역도 생기고 제법 굳은살도 생겨 인생사 어지간한 풍파에도 잘 견뎌낼 내공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허물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며 보지 않고도 본 것처럼 옮기고 들은 것도 듣지 않은 것을 보태어 전하는 과정에서 주워 담지 못할 허물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 와서 돌아보면 훌륭한 훈련이었지만 지난 시련들의 요소 중 가장 힘든 것이 말로 인한 상처였다.

오래전 고명한 스님이 부부싸움이 심해 해결을 부탁하러 찾아온 주부에게 신비한 샘물을 한 통 선물했다.

혹여 남편과 싸울 때가 오면 포악한 남편이 잠잠해 질 때까지 그 물을 한 모금도 넘기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곁들였다.

물론 독자분들의 예상처럼 부부싸움은 그쳤으며 그 원인에는 주부의 침묵이 해결의 열쇠였다.

사람 사는 삶의 복도 말이요 화도 말이다. 사람이 말이 없을 때는 할 말이 아주 많거나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때 두 가지 상황이 있다.

그래서 말은 아끼는 것도 좋지만 시기와 양과 질을 맞춰서 빼야할 말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만 있다면 넉넉한 덕담도 상대방에게 고마운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냥 침묵이 금은 아니다.

오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과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일명 ‘농아인’이라고도 하는데 세계적으로 약 15억 청각장애인이 여기에 해당된다. 말하고 들을 수 없는 소리 장애인에게 음악을 즐기고 삶의 활력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을 준 방탄소년단의 수화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현재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장애인은 263만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1%인데 그 중 청각장애인은 15%로 지체장애인 다음으로 비율이 높다.

청각장애인은 지난 10년 동안 약 4.6% 증가해 장애 유형 중 가장 높게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설마 또는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청각장애인의 세계는 시각장애 못지않게 심각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든 현실적으로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세계는 수화라는 만국공통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수요자 말고 일반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물론 알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새소리, 물소리 보다 사람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손짓으로 온갖 의사전달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국경을 넘어선 만국공통어라 볼 수 있다.

야간침투에 나선 특공대원들이 손짓으로 전진·후진의 의사전달이 되는 것도 이처럼 수화에 기본된 것이다.

속상할 때 가슴을 치거나 화날 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도 이 같은 맥락 아닐까. 앞서 어필한 것처럼 말이란 안하는 것도 좋지만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오늘 필자는 신체적 기능에 장애가 생겨 소리에 대한 장애가 있더라도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배려를 논하고자 한다.

언젠가 버스를 탔다가 말없이 서로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남녀 두 학생들을 본적이 있다.

말끔하게 잘생긴 남학생과 한눈에도 귀여움이 가득한 여학생이 해맑은 표정으로 수화를 주고받는 걸 보면서 장애란 누구나 있을 수 있으며 이를 장애로 보는 견해가 문제임을 느끼게 됐다.

아무 불편함없이 자연스런 생활임에도 이를 불편할 것이라 여기고 편견을 갖는 사람들의 인식문제다. 이제 장애라는 명칭 자체가 외눈박이 세상이 두 눈의 사람이 살게 되면 겪어야 하는 어색함과 같은 것이다.

오늘은 지난 2021년 대한민국이 처음 정한 ‘수어의 날’이다. 올해로 두 번째 맞이하는 수어의 날은 전세계가 정한 수화의 날을 근거로 정해진 날인데 손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수화가 대중화 되어 대중적인 행사의 상영화면 하단 우측에 별도의 화면으로 손동작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를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자 당사자뿐이다.

이쯤되면 수어의 날을 맞이하여 뭘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을까. 간단한 수어는 배워두자.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알아듣고 도와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외국어를 배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필자 또한 몇 마디 모르는 수어지만 누구나 어디서나 어떤 나라에서나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어는 국경을 넘어선 인류애의 실천이다.

어려울까, 아니다. 의외로 간단하며 손짓만으로 온갖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알 수 있기에 신기함도 느낄 수 있다.

손과 팔 표정과 입술 움직임까지 동원되는 수어는 한번 배워두면 자전거처럼 평생 잊지 않는 제2의 언어다.

절대 소리 내면 안 되는 상황, 보이지 않는 인류애의 실천을 해보고 싶다면 지금 즉시 인터넷을 뒤져 수어의 세상에 노크해 보는 실천, 안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겠지만 지금처럼 한번쯤 배워두라는 필자의 권유가 나비효과처럼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아주 조금 더 살만하지 않을까.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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