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어린이날 100주년을 기념하며
[덕암 칼럼] 어린이날 100주년을 기념하며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5.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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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br>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어린이, 어린아이의 준말이다.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어린이라고 하며 대한민국 어린이의 현주소는 어떨까.

100주년을 맞이하여 온국민이 다 함께 짚어보자.

먼저 100주년이라 함은 1922년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움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만들었다는 방정환의 서문에서 시작됐다.

그 이전에는 애 녀석, 어린애, 아해놈이라는 말이 있었다가 어린이를 줄인 말로 표현되었고 함께 지칭된 늙은이·젊은이란 말도 이때부터라 한다.

얼마 전 호적 나이를 새로 규정하면서 만으로 1살 줄여 불리던 나이가 뱃속에 임신한 시점을 생물학적 출발로 치던 계산이 달라진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어린이의 출발이 생명체의 출발이라면 태교부터 아이 교육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좁은 한반도에서도 어린이를 칭하는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함경도지방의 얼라부터 호남지방의 어린놈·어린애기 등 다소 거칠면서도 정감이 있는 호칭이었다.

그럼 몇 살까지는 어린이로 볼까. 아동복지법에는 18세 미만인 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요즘처럼 신체 발달이 왕성한 시대에 18세를 어린이로 인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실제로 행정기관의 호칭을 보면 2세까지를 영아, 5세까지를 유아, 13세까지를 아동으로 부르기는 한다.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는 단순하고 순진하기에 험한 세상에 내놓기에는 물가에 애 내놓은 것 같다며 우려를 표하고 ‘애들 보는 데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로 미래의 꿈나무들에 대한 조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어릴때 조기교육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조기교육의 실태가 과연 그러할까. 태어날때부터 과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다.

자연분만도 있겠지만 산부인과의 제왕절개로 시작되어 산후조리원을 거친후 모유 대신 분유를 먹이는 게 대세다.

어느 정도 걸을만 하면 어린이집으로 보내지고 원생들간의 유대관계(?)를 쌓는 동안 윗사람에 대한 예절보다는 자신의 방어와 지식습득의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는 동안 업고 안고 먹여가며 기저귀 갈던 과거의 어머니 보다는 청소기 돌리고 커피 한 잔의 휴식과 전화통화에 적잖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와의 공백은 어린이가 스스로 살아야 할 첫 시험대에 불과하다.

살아가는 동안 걸핏하면 어린 것이 어쩌고 하며 무시하는 경향도 있고, 청소년이 되면서 한 살이라도 부풀리려는 욕심도 나지만 이는 곧 얼마 가지 않아 줄이려는 욕심으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기실 한국처럼 나이가 계급인 나라도 드물다. 경어를 쓰지 않으면 즉각 무시한다는 걸로 단정하고 이 같은 인식은 어릴수록 무조건 부족할 거라는 선입견도 앞서기 때문이다.

연륜이 경륜과 병행될까. 필자는 전혀 무관하다고 본다. 특히 나잇값 못하는 연장자의 경우 나이를 재산처럼 뻐기는 흉한 모습을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

유능할 수 없지만 악할 수도 교묘하거나 교활할 수도 없는 것이 어린이다. 이제 시대가 변해 어린이는 줄고 어르신은 늘고 있다.

지금같은 추세라면 적어도 30년 안에 어린이는 귀한 보물처럼 떠받들어져야 하고 어르신은 낡은 폐지처럼 취급되어도 남아도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어린이는 잘 교육되어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리 미래가 밝지 않다.

옛말에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했던가. 못 배운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도 잘 가르친 자식은 서울로 가서 연락도 안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뜻이다.

현재의 어린이에게 기성세대가 어떤 교육과 대우를 했으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돌아보자.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없기에 제 아무리 많은 돈과 영향력을 갖춘다 해도 결국에는 지금 자라는 어린이가 기성세대가 될 것이 자명하기에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부모 잘 만나 있는 집 아이들이야 고액 과외에 명문대를 졸업해서 손끝에 물도 안 묻히고 살겠지만 없는 아이들의 환경은 참으로 혹독하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양반집과 노비들의 자식들 차별이 그러했고 지금도 빈부격차에 따른 아이들의 성장환경은 다를수 밖에 없다.

오직 부모 잘못만난 죄, 양반자제가 글공부를 하는 동안 노비자제는 마당을 쓸어야 했다.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며 느껴야 할 불편함은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너나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공통적으로 조물락거리며 내용의 대부분이 상대방을 죽이거나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어릴때부터 꾸준히 심어진 이기적·공격적 습관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걱정된다.

말로는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업혀 있던 시대와는 달리 멀찌감치 유모차가 대신하고 정성껏 끓여 먹던 간식들도 다양한 인스턴트나 일회용 푸드로 변해갔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들의 성장환경이 기성세대의 경제적 파국에 이르면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방치의 출발로 이어진다.

질병관리, 교육, 의복은 물론 예절과 미래에 대한 꿈조차 모두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심지어 아동포르노의 피해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운이 좋아야 할머니 슬하에 모든 생존방식을 터득해야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망설이지 않았던 과거와는 달리 보물단지여야 할 어린이가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통계가 점차 늘고 있다.

차마 얼마라고 기록하기에도 민망한 한국사회의 도덕적 붕괴, 문득 엄마의 팔베개에 젖을 물고 잠들던 아이들의 평온하고 행복한 모습이 전설로 남을것 같다.

적어도 필자는 그러한 호강을 하고 자랐기에 지금의 아이들에게 뭘 남겨야 할지 모두 함께 고민해야할 날이다.

선진국이라고 떠들기 이전에 결식아동들의 배를 뭘로 채울 것인지부터 확인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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