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풀리지 않는 역사적 숙제 5·18
[덕암 칼럼] 풀리지 않는 역사적 숙제 5·18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5.18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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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5월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곡이다.

1980년 5월 18일 필자가 태백공고 1학년 재학 중이던 당시 언론보도에는 빨갱이들이 광주에서 난동을 부려 군부대가 진압중이라는 보도 외 별다른 소식을 접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1987년 육군 병장으로 전역할 6월 10일 부산시내에는 자동차 대신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고 대한민국의 민주화 열망은 폭발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군복을 입고 외출하면 자칫 군중들의 표적이 될수 있다는 전령에 사복을 갈아 입고서야 외출할 수 있었던 당시의 모습을 지금 돌아보면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과도기였다.

1988년 임수경 씨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의 참가하자 마치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것 같은 환상을 안고 민중가요를 배우며 밤마다 ‘이적 도서’ 책을 보며 무슨 독립투사라도 된듯 착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강원도 태백은 석탑산업 합리화정책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대한민국의 마추픽추였다.

수 십개의 고갯길들을 지나면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인구 12만의 탄광촌, 마추픽추 처럼 사람이 살수 없이 척박한 태백산맥 깊은 골짜기에 오로지 광부들만의 삶이 존재했던 그 곳은 약속의 땅이었다.

‘거기서 만나자’ 대한민국 격동기에 많은 사람이 한몫 잡아 살겠다고 목숨 걸고 모인 땅, 잠시만 벌어서 다시 나오려했지만 그렇게 수 십년을 살아온 수 십 만명의 사람들, 당초 석탄이 없었으면 지금도 한국의 산천은 북한처럼 벌거벗었을 것이다.

나무에서 석탄으로 다시 석유와 가스로, 태양광발전소와 수소연료가 대세를 이룬다. 석탄산업 합리화를 막겠다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경찰과 대치했던 날들이 얼마나 무모한 어리광이었는지 알게 된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이후 8년이 지난 시점에서 알게 된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진압, 무고한 인명피해, 자유를 향한 국민들의 저항은 그렇게 군부독재의 종식을 맞이했다.

그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모든 진실은 밝혀지고 최종 명령권자인 전두환 씨와 그의 부역자들에 대한 내막이 밝혀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광주에 대한 진실이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아들의 싸늘한 시신을 안은 채 억울하게 오열하는 어느 노모의 사진이 상징처럼 비칠까.

일각에서는 광주민주화를 여전히 북한의 소행이라 하고 호남지방의 성역으로 비춰지는가 하면 더불어민주당의 본산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자유를 향한 국민저항이 이래저래 정치적 거래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광주민주화를 발판으로 누구나 검은 양복에 흰 국화만 헌화하면 정치적 열사로 둔갑하는 이미지 전환의 포토 존 정도로 남용되어도 안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지 42년, 당시 23살 청년이던 이모씨,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를 이씨의 행방이 궁금한 건 광주에서 도피한 청년이 탄광촌에서 어금니 물고 살아가며 고향에 전화 한통 안 하고 살았던 아픔을 항상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면 65세 정도니 거리에서 만나도 못 알아볼 시간이 지났다. 한 나라의 과도기에 피할 수 없는 게 국민의 희생이다.

비단 광주뿐만 아니라 전쟁중이나 내란중에도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발생한 국난에 죄없는 국민들의 소중한 생명은 한낱 부산물에 불과했다.

얼마 전 금방이라도 역사적 고증을 거쳐 모두 찾아낼 것 같았던 제주 4·3항쟁도 그러하고 작금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특정 정당에서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못한 것이 그러하다.

의혹은 누구나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캘 수 있고 밝힐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것과 못한 것의 차이가 아이러니하다.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나 이해득실 속에 어쩌면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일까.

문제는 앞으로도 유사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자칫 정국의 혼란이 특정 세력의 승산이 될 수는 있겠지만 국민에게는 더 없는 상처가 된다.

지구상 어느 나라든 변화에 따른 과도기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낳은 비극은 이제 민주화의 성역, 그 이상도 그 이하여서도 안 된다.

걸핏하면 민주화의 전사나 된 듯 쇼맨십 하는 장소여서도 안 되고 오직 피해자와 관계자, 그리고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억울한 이들의 영혼이 위로받는 그런 곳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특히 이를 빙자해 특혜의 새치기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국가보훈처나 관련 부서에서 솎아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혹여 나라가 국난에 빠져 위기에 처하면 고귀한 생명을 바쳐서라도 애국의 길을 선택하는 의인들이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돌아보면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난 건 민중봉기나 동학혁명처럼 농민들의 의지였지 정치인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의 날’이었다. 1894년 일어난 일인데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9년 제정된 날이다.

어쩌다 125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기념일로 정했을까. 그 동안 뭐가 무서워서 방치했을까.

이래서 역사는 사람을 앞서는 것이다. 불과 100년도 못 살고 10년도 못 가는 권력이 가져온 오욕의 역사다.

권력의 부패에 못 견딘 농민들이 민중 봉기로 일어나자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의 백성을 살육하면서 까지 권력을 유지했던 조선의 못난 과거, 임금이라고 섬긴 무지한 백성들,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했다.

이제 남은 건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일이 없어야 하고 국민들의 희생도 더는 없어야 한다. 요즘 들어 북한의 미사일이 시도때도 없이 상공을 날아드는 건 멀쩡한 하늘에 폭죽놀이가 아니다.

어떤식이든 국민의 불행은 막아야 한다. 그저 지금같은 평화가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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