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덕암 칼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5.25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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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란 말이 있다.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일을 평상시에 방치하다 뒤늦게 후회한다는 뜻인데 현대 사회에서 축산농가 외에 소 잃을 일은 드물 것이고,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막는다는 것은 삶의 지혜이자 선견지명을 통한 자기관리의 일면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방할 수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일지 살펴보자. 겨울에 추울까봐 두꺼운 외투를 입는다면, 비올까봐 우산을 챙긴다면, 배고플까봐 도시락을 챙긴다면, 혹시 다칠까봐 비상약품을 준비한다면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전준비다.

좀 더 나아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화재를 대비해 소방관들이 평상시 화재진압 연습을 하거나 장마철에 산사태를 대비해 붕괴위험이 있는 곳의 주민을 대피시킨다면 이는 사전 예방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자연재해나 각종 사건·사고를 남의 일처럼 여기며 방관하거나 구조에 망설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의인들이 도처에 넘쳐나 때로는 소중한 인명을 구조하기도하고 길 가던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너나 할것 없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야 자칫 잘못 개입했다가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옆에만 서 있어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쯤하고 질병이나 상해에서 금전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 보험이나 기타 사회보장제도라면 일단 유사시 발생한 재난에 대해 얼마나 대비하고 있을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했던가.

사고든 질병이든 자신이 다친 후에 잘하면 뭐할 것이고 이기면 뭐할 것인가. 살아남아야 따지고 말고 하는 것이기에 재난이나 질병, 상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러기에 누구도 그러한 위험에도 안전하다거나 미포함 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이라면 누구든 그러한 범주에 속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은 조심만 하면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필자가 취재과정에서 만나 본 많은 사람들 중 휠체어를 타고 있거나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다칠 줄 알고 피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나름 잘 나간다는 자부심과 날고 기는 용기로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불행의 초대에 응했다가 신체적·정신적 불구가 되어 암담한 나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쯤하고 오늘은 26회째를 맞이하는 ‘방재의 날’이다. 단어 그대로 풀자면 재난을 방지한다는 뜻인데 1996년 5월 25일 제정되어 각종 행사나 관변단체로서의 역할에 일조하고 있다.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을 찾아각종 통계를 보면 자연재해인 천재지변과 인재로 나뉠 수 있고 무형과 유형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자연재해야 하늘이 내린 벌이니 미국의 토네이도나 캘리포니아 산불이라 어쩔 수 없다 치자. 한국의 경우 장마철이면 반복되는 수재민도 그렇고 동해안 산불도 이제는 익숙한 단어가 됐다.

하지만 인재는 경우가 다르다. 사람이 자연에게 덤볐다가 된통 당한 적이 어디 한 두번인가. 멀쩡한 바다를 막아서 간척지가 생기기는 했으나 천혜의 갯벌 훼손은 어떤식으로든 복구되지 않는다.

갯벌이 인간에게 주는 천문학적 혜택과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전문가들만이 아는 비밀이 됐다.

뿐인가 무분별한 개발제한 구역의 확대, 교통이 필요한 곳이면 시공을 초월한 공사, 그래서 터널, 교량, 항만은 물론 해저터널까지 생겼다.

하늘도 마찬가지고 이제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망은 마치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인 듯 착각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때 공존의 묘미가 생기는 것이지 문명의 불균형이 가져오는 운명의 벌칙은 늘 언제 어디서든 적용되게 된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무리한 욕심이 가져오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무형이 재난이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만 진정한 재난은 무색·무미·무취다.

가령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던가. 냄새가 있던가. 수 만명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아직도 위드 코로나 내지 원숭이가 어쩌고 하며 언제 또 창궐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코로나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니 덜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재난은 우리 가까이 늘 함께 존재한다.

몸만 멀쩡하지 정신이 썩어빠지고 이성보다 본능을 앞세우는 현 세대의 무분별한 사고방식과 실종된 도덕관이다.

자신을 낳아준 보물보다 귀한 부모가 애물단지가 되어 요양병원에 보내지면 이래저래 바빠서 면회조차 가지 않는 도덕의 실종, 어느 날 돌아가시면 이미 소가 외양간을 나간 것이나 진배없다.

무엇을 잃었을까. 늙어 쭈그러진 노인의 병원비는 대부분 국가에서 냈으니 별반 걱정 없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언제 한번 편안한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머나먼 황천길을 보냈으니 허전할까.

아니면 부고장을 온 사방에 띄워 조의금이나 길게 줄지어 선 조화행렬에 어깨 힘을 주어보는 기회가 될까. 또 하나 무형의 재난은 국민들의 도덕성 실종이다.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과 국가가 있어야 사회와 가족과 내가 있다는 근본을 망각하는 사고, 그래서 표 구걸에 온갖 장밋빛 공약으로 군복무를 억울한 희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젊은 여성은 대를 끊어놓겠다며 출산 거부로 으름장을 놓는 세상이 되었던가.

근로자는 인원수 중심의 표가 두려워 온갖 노동정책을 발표하여 권한만 내세우며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착한 사람의 배려는 악한 사람에게 권리가 되었으며 일하기보다 놀며 각종 수당을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은 정권유지의 오류가 낳은 산물이다.

이것이야 말고 진정한 재난이며 유형의 재난이나 천재·인재보다 더 대책 안 서는 인류사회의 적색 신호등이다.

대안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아무리 국민이 제정신으로 살려 해도 본능을 건드리며 게으르게 만드는 것은 거부해야한다.

계속 꼼작도 않고 TV 앞에서 리모컨만 누르고 있으면 근육이 마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이라도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을 모두 내보내고 내국인들에게 삽과 곡괭이, 망치와 드라이버를 쥐어주어 땀에 대한 보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성실한 국민에게는 상당한 보수를 주어 맞벌이 하지 않아도 열심히만 살면 잠자고 먹고 생활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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