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아베 신조의 공덕비, 김정일의 공덕비, 테러와 사살의 변곡점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의 실소(失笑), 일본정치의 한계와 한국의 “복잡한 외교술 시험대”!!
[사설]아베 신조의 공덕비, 김정일의 공덕비, 테러와 사살의 변곡점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의 실소(失笑), 일본정치의 한계와 한국의 “복잡한 외교술 시험대”!!
  • 이찬엽 논설위원 pinetree0516@hanmail.net
  • 승인 2022.07.11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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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엽 논설위원<br>
▲이찬엽 논설위원

보기 드문 일에 세계가 놀랐다. 아웅산 테러에 비견될까.

일본 전수상 아베 신조가 테러를 당했다. 그리고, 115년 전 이토 히로부미도 급소환됐다. 그런데 아베 신조는 자기 수하였던 전 자위대원에 의해 테러 됐고,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

일본 경호의 민낯을 보는 듯했다. 민낯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도취를 보는 듯했다. 테러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경호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테러에 의한 사망에 한국인은 누구나 이토 히로부미를 생각했을 것이다.

망자의 부 아베 신타로와 그의 조부 아베 간과와는 상반된 정치 인생을 살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매사 반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부와 조부는 호전주의자가 아니었고 타협할 줄 알았던 정치인이었으나 아베 신조에 이르러 한국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대놓고 하곤 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를 소환시키기에 충분했고 그의 공덕?이 북의 김정일의 공덕?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그는 열세에 몰린 자파(自派)의 급전(急傳)을 받고 지원 유세를, “나가노현에서 나라현 교토부로 바꾼 것”이 원인이 되어 종국을 맞았다.

황당하게도, 일본 매체는 한국인의 범죄를 또다시 거론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자국민 그것도 “자위대 출신”이라는 점에 놀라며, “속 좁은 국민성”을 다시 한번 “자책”했다. 그렇다면, 소환된, “이토 히로부미”가 웃(失笑)을 일 아닌가. 중국은 이에 잔치 분위기다.

정치적 자산이 많았던 아베 신조는, 보기 드물게 세 번의 총리를 지낸 일본의 정치 중심세력이었다. 전쟁을 겪은 적이 없고, “승승장구”만을 했던, 세상을 쉽게 본 정치인이었다.

한국에서는 “정치에서의 악의 극화”가 자주 일어났지만, 일본은 그나마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거의 없었기에 모두가 주목했다. 오죽했으면, 모 국가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로 보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 정권을 쥔 아베는 “레이거노믹스”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의 경제재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즉, “아베노믹스”에 의해 인기가 식을 줄 몰랐다. 비교하여 북도 “김정일노믹스”를 꿈꿨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고, 더구나 “화폐개혁의 실패”로 10만원이 천원의 가치밖에 안 되는 불행한 결과만 남겼다.

지독한 인플레이션 즉, 잡을 수 없는 물가앙등은 아무리 좋은 처방도 듣질 않았다. 역량 부족은 기본이었다. 실질적으로 당시 현금을 보유하고 있던 상인들의 몰락이 북의 경제적 몰락에 못을 박았다. 오로지, 로동당의 존립을 위해 인민의 돈을 화폐개혁을 빌미로 환수하여, 휴지조각과 같은 신권으로 교환해 준 것이 로동당의 속셈이었다. 

김정일도 젊은 나이에 김일성 다음으로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는 점에서, 아베 신조와 닮았다.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통해 인민을 억압했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반면 아베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일본 경제를 구제한 주도세력의 수장이었다.

그렇다면, 유동성 함정에 빠진 한국을 구할 자 누구인가. 한국의 현실은, 화폐를 아무리 공급해도 경제가 살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침체되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즉, 화폐의 공급이 실물경제에 특별히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가계와 중소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늘리지 않고 있다. 망자여. 왜 그런가!

김정일은 “3대 세습”을 노리고 인민을 압박했지만, 아베는 “3번의 수상직”을 수행하면서 주변국과 매사 갈등을 연출했다. 북의 강성대국 기조와 일본의 군사 대국화가 어찌 이리 닮았을까.

또한, 아베와 김정일의 공통점은, 역사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외교사에서 늘 중심에 서려 했다. 아베는 태평양 전쟁의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에 열을 올리곤 했다.

“역사에 역주행”했다. 김정일도 역사를 왜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군사상과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종교로 북한 “인민을 중환자”로 만들었다. 아베 사인(死因) 또한 종교와 관련성이 있다.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사이비종교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기술을 보유한 유능한 인재?였다.

구체적으로, 군사적 측면에서도, 군비증강과 핵무장 등에 혼신을 다한 김정일과 일본 자위대의 재무장과 군사 강국을 추진해 온 아베의 생각은 일치했다.

아베의 야망은 급기야, 국방 예산을 5조 3천억 엔으로 증가시켰고, F-35 100대 수입, 구축함급(30FFM) 20척 구매, 수륙기동단 창설(해병대), 이즈모급 함선 2척 건조를 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결과, “북은 핵”, “일본은 군사 대국”이 저절로 달성됐다.

그러던 그가, 2022년 7월 8일, 나라시 참의원 의원 사토 게이 후보의 지원 유세 연설 중 전 해상자위대 자위관 소속 “야마가미 테츠야”에 의해 피격당해 사망했다. 피격을 가한 “야마가미”의 말을 살펴보면, 정치적 신념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에 의한 살해였다.

이건 의외였다. 그것도, 아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해상자위대 소속 젊은이에게 총격을 받다니. 그것도 자신의 모의 종교적 문제 때문에,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되다니...반전이 크다.

이번 테러에서는, “총기 무단 판매”와 “디지털 문화의 폐단”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쉽게 총기를 구입한 것과 이동상황을 확연히 알 수 있도록 한 선거유세에 대한 정보의 유출이 중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아베 신조의 착각이 사망을 더 앞당겼다. 그가 즐겨보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도 경호원 없이 “강렬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영웅심도 작용했다. 세상을 모르고 “꽃길만 걸어온 정치인”의 종말을 보는 듯했다. 그도 “민심”을 몰랐다.

그럼, 김정일은 또 어땠는가. 지독한 영화광이었으며 남한의 연예인까지 납치(신상옥, 최은희 납치 사건)하는 “촌극”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모두가 자기중심 자기착각 아니었던가. 남한의 정치인들도 이것을 배움으로 삼아야 한다. 

의처증처럼, 의부증처럼, 이번에도 일본의 매체들은 한국을 의심했다. 그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된 것에 대한 의미와 충격이, 1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 마음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야마가미”가 자신의 어머니가 종교단체에 빠져 가정을 파탄시켰고 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아베 신조를 사살했다는 말에, 일본 정치권에 대한 믿음과 리더쉽이 일반 서민에게는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일관계를 놓고 보자면, 전 정부에서는, 곳곳에서 일본과 충돌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일본은 침략국이면서도 반성하질 않고 뻔뻔할 정도로 한국을 괴롭혔다. “미친개”도 그럴 순 없을 터인데 “인면수심”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국가면제”를 주장하는 순간, 그리고, 한국의 법조계 다수에서 이를 지지하는 기류에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한국 법정에 세워야 하고, 국가원수인 “일본 왕을 피고인”으로 세워야 한다.

2차대전 종전 당시 국제사법재판소가 독일의 전쟁에 대한 손해배상(강제징용)에 대한 원고 측 패소 결정을 한 주심은 다름 아닌 일본의 “오와다 히사시” 였다. 국가면제를 전범 책임자가 판결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인걸.

그렇다면, 본 사건을 놓고 봤을 때, 북의 김정일은, “공덕비(功德碑)”를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mirra)”로 대신하고 있는데, 망자인 아베 전 수상은 어떤 공덕비를 세워야 할까. 이웃 나라와 잘 지내라는 “선친의 유언”을 뒤엎고 “불효”까지 했는데, 설마하니 한국을 폄훼한 공덕비를 세우는 것은 아닐 테지. 

아무튼, 일본은 흔들리고 한국에 애원하듯 매달릴 것이다. 그래서, 한국도 일본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북한보다 다루기 쉬운 상대가 일본 아닌가.

철저히 “실리”로 나가되 과거의 행태를 “꾸짖으며” 나가야 한다. 일본의 “전범 사과와 충분한 배상을 받아냄”과 동시에 한편으론, “선의의 군사협력”을 통해 국가 안위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아주 “복잡한 외교”를 구사해야 할 것이다.

이찬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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