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모든 화는 입에서
[덕암칼럼] 모든 화는 입에서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07.22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오래전에도 그랬고 최근에도 문제가 된 모든 화는 사람의 입에서 출발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불거진 일들을 대표적으로 손꼽자면 이재명 현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 당시 형수 욕설 파문이 끝까지 꼬리표가 되었다.

알 만한 사람은 모두 들었듯이 전화 통화 내용에서 선명하게 들린 이재명 의원의 목소리는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권좌의 용상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한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데 일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도 최서원 씨에게 돈을 요구하던 내부자의 허위 진술이 마치 사실인 양 확산해 대법원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종점을 맞았다. 함께 동고동락하던 정당인들까지 유권자의 표가 두려워 등을 돌렸다.

최근 영화 ‘위대한 침묵’에서 상영된 내용에 의하면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불거진 말로 시작해 역사의 얼룩진 오명을 남긴 셈이다. 최근 들어 국민의힘 이준석 당 대표가 ‘성접대 사건’으로 정치적 몰락에 가까운 모습으로 추락한 건 한때 소기의 목적으로 접근한 사업가 A씨의 폭로에서 시작됐다. 의혹은 더 늘어간다.

대통령선거나 지방선거 전에는 왜 안 터졌을까. 그 전에는 몰랐을까. 이미 세간에는 충분한 냄새를 풍겼음에도 어찌어찌 넘어갔다가 선거가 끝난 다음에야 불거진 사건이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말이란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침묵은 금’이라 했던가. 지금은 말 대신 스마트폰의 문자나 화면, 각종 이모티콘이 소통의 대세를 이루며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의사를 주고받는 시대가 됐다. 돌이켜 보면 손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며칠 기다려야 상대방에게 배달되고 상대방의 답장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적어도 일주일은 걸렸다.

그래도 귀한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며, 어렵사리 주고 받은 편지 속에 서로를 위하는 말들이 글로 표현되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는 쓰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배려해 몇 번을 고치게 되지만 문자메시지나 SNS는 그렇지 않다. 빠른 속도로 인해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필자가 글 속에서 수시로 과거의 일을 들추는 건 문명의 발달에 역행하는 부분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며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측면임을 전제한다. 오래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국회는 정책의 전쟁이 아니라 말의 전쟁이다. 중앙만 그럴까. 지방도 대동소이하다.

이러니 국민들이 뭘 보고 배울 것이며, 아이들에게 무슨 가정교육 어쩌고 할 것인가. 상대방을 비난하고 업신여겨야 자신이 더 올라간다는 심리가 확산하면서 말 한마디라도 상대방을 곱게 위하기보다는 보나마나 뻔한 억측을 사실로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다.

남의 성공은 귀감이 되어 축하할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 시기·질투나 험담으로 깎아내린다고 깎일 일은 아니다. 부러우면 진다는 논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더 체감할 뿐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다양한 말의 위력을 겪겠지만 언론에 종사한 긴 세월을 돌이켜 보면 한쪽 말만 듣고 보도했던 표현의 오류나 사회적 정의를 위해 소정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던 일들이 태산같이 많았다.

최근 필자가 체험한 사례를 예로 들자면 사실을 확인도 하기 전에 이미 구전을 통해 확산한 일들이 마치 사실인 양 확산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내용이 보태진다. 결국에는 허위사실이 기정사실로 확정되어 대상자는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과 모든 삶이 피폐해진 다음에야 많은 시간이 흘러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이때 나온 말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다. 오죽하면 형법 제307조 명예훼손의 죄라는 항목이 생겼으며 제2항에서 허위일 경우 그 죄는 더 가중된다는 조항이 덧붙여졌을까. 마음 같아서야 본보기로 몇 사람을 고소하여 함구령을 내리고 싶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찌 주워 담을까. 그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래본들 반성보다는 원망이 더 클진대 인자무적이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이라 여긴다.

문제는 과거보다 더 각박해진 사회적 분위기가 갈수록 치열해진다는 점이다. 서로 이간질하고 미워하며 자신의 안위와 보호를 위해 안 해도 될 타인의 배척이 불러오는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연령이 낮을수록 심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남이야 죽든 말든 간섭 말고 너만 살아남으라는 이기적인 가정교육에서 비롯된다.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 사실을 확인한 후 말을 해야 함에도 남의 말, 특히 언론의 편파적 보도나 주변인들의 말에 의존해 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 발설했다가 책임소재를 되레 물어오는 경우 꼼짝없이 형사적 처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험담을 전하는 사람은 들은 사람까지 공범으로 만드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근거 없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 그만하라는 일침을 놓는 것도 서로 돕는 방법이다.

특히 남의 험담에 침을 튀기며 전하는 상대방은 듣는사람에게 똥물을 퍼붓는 것이나 진배 없으니 절대 동조하지말고 외면하는 것이  도리다. 그 사람은 어느 곳이든 험담을 즐기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그 대상이 될 소지가 크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이라는 게 남의 험담은 솔깃하면서도 자신이 그 대상이 된다면 펄펄뛰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메랑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이 죄를 미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함해야 하고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잃는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당연히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설명이 난무할 것이며, 당위성과 명분을 갖추기 위한 허구적인 내용들은 귀에 솔깃한 내용으로 판단의 오류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만이 옳다며 독선으로 무장해 결국에는 타인의 말에 경청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의 종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적어도 필자의 독자라면 함부로 말을 전하거나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의 글을 전한다. 예측은 예측으로 끝나야지 억측으로 변질돼 미리 짜놓은 자신만의 논리에 억지로 집어넣는 프레임 작업이 돌이키지 못할 죄로 남게 된다.

죄 안 짓고 살아도 짧은 삶이다. 서로 위하며 귀히 여기고 살아도 부족한 삶의 여정이다. 독한 시어머니와 부족한 며느리의 의견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