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은혜는 돌에 원수는 물에
[덕암칼럼] 은혜는 돌에 원수는 물에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0.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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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사람이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질수도 있고 또 때로는 이유도 없이 괴롭힘과 고통을 당하는 악연을 만날 수도 있다.

전자는 깊이 감사할 일이고 죽어도 잊지 못할 일이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던가. 시간이 지나면 그냥저냥 잊어지는 것이고 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후자는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두고 보자 언젠가는……. 그래서 나온 말이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간혹 소심하고 뒤끝이 작렬이라서 장부책에 살생부를 적어두고 세월이 가더라도 보복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필자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는데 세월이 약이라고 분노와 다짐은 한해 두해 지나면서 시간 속에 점차 무디어간다.

이쯤하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절대 잊지 못할 신세를 진 존재가 있다. 물론 주도는 미국이 했지만 낯선 나라에 와서 목숨 걸고 싸운 연합군의 은혜는 알아야 한다.

도움 받고 나서 이제 살만하니 미국이 전략상 도운 거라느니 국군의 북진이 너무 강했다느니 별말이 다 나오지만 6·25전쟁때 연합군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엔의 날 또는 국제 연합일에 대해 신세진 나라로 그 날을 기념하고 걸맞는 기념행사가 뒤따라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디 그렇던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아주 먼 나라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는 실정이다.

유엔의 날은 1945년 10월 24일에 창설됐다. 당시 세계적인 분위기는 전쟁이후 국제 평화를 유지하고 각 나라 사이의 우호를 다지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문제에 대해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점이다.

유엔은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신탁통치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사무국 등 6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있으며 국제노동기구·세계보건기구·국제부흥개발은행·국제통화기금·국제원자력기구 등 16개의 전문 기구가 있다. 다소 생소하겠지만 한국도 유엔기구 신세를 진 것이 전쟁만은 아니다.

과거 국제통화기금인 IMF 신세를 지고 겨우 부도직전에 살길을 찾았던 시절도 있었고 원자력기구에 가입하여 원자력 수출의 주역이 된 적도 있었다. 이제 자국 내에서 대충 꾸려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식품 규제, 탄소규제, 친환경 제품은 물론 모든 국제간의 교류에 유엔의 영향력을 배재할 수 없는 국제화 시대에 돌입했다.

따라서 한국이 유엔기구에 어떤 위치로 자리매김하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지난 제8대 국제연합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前 사무총장이 국격을 상승시키는데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는지도 돌아볼 일이다. 2006년 10월 13일 192개 회원국으로부터 만장일치로 선출된 반 총장은 한국 외교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남아있다.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반기문 前 사무총장같이 한국인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릴 날이 올지 알 수 없으나 유엔의 날을 맞이하여 반 前 총장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것도 같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동참의 뜻이 담긴 것이다. 작게 축소하자면 어느 마을에 가뭄이 들고 역병이 창궐하여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면 인근 마을과 나아가서 타 지방까지 합세하여 서로 돕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대한민국은 이대로만 두면 그냥 저냥 먹고 사는 것은 별일 없을 만큼 성장했다.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부르니 모두다 잘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국제사회에서 볼 때 영 형편없는 나라는 아니다. 반면 아프리카나 주변국가에서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후진국 수준의 문화생활과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빈민국이 많다.

도움을 받았다면 천재지변이나 기타 전쟁으로 힘든 나라에 구호물자도 보내고 봉사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나름 선진국으로서의 베품이자 은혜를 변제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으니 오늘은 이런 부류에 대해 일침을 놓고자 한다.

가뭄에 구정물을 마시는 아이들을 들러리로 내세우거나 파리떼가 달라붙어 흉측하게 말라버린 아이들을 홍보영상의 소재로 삼아 돈을 기부하라고 부추기는 일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100원을 거둬서 차 떼고 포 떼고 실제 현장에 전달되는 금액이 얼마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일단 거둬들인 수입도 그렇지만 사용처를 공개하지 않는 모금, 동정심을 유발하여 걷은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모순이 드러난다면 누가 기부에 나설까.

오래전 국내 모 단체에서도 후원금으로 구성원들의 성과금 잔치를 벌이다 언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구호는 왜 국제사회의 앵벌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지 아이들을 임신시킨 장본인은 어디로 가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동냥질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반대로 진정성 어린 마음으로 해외봉사에 나서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 도움의 방법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종교적이든, 심지어 교육이나 의료분야든 상관없이 작게는 이웃을 크게는 빈민국을 돕는 것이 신세진 보은국민으로서 변제의 양심적 책임을 지는 일이다.

학사보다 박사, 박사보다 밥 사는 사람이 대우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훌륭히 사는 감사와 봉사다. 말이 쉽지 막상 해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 또한 여러가지 사정으로 배움의 때를 놓치고 한글도 못 읽는 분들을 검정고시로 대학까지 학습을 지도하는 야학교 사회과 교사를 수년간 봉사해 본적이 있다.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는 방법과 분량과 때와 장소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는 나누고 싶어도 그럴 힘조차 없을 때가 오면 너무 늦지 않을까. 유엔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도 이제는 받은 만큼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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