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대청해전은 예고편인가
[덕암칼럼] 대청해전은 예고편인가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1.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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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또 쐈다. 9일 오후 3시 31분 북한은 평안남도 숙천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추가 발사했다. 주변 어선들과 관광지는 예전처럼 평온함을 유지했고 이제는 미사일 발사가 일상처럼 여겨진다.

이미 지난 5일 오전 11시 32분 서해상으로 탄도 미사일 4발을 발사하고 지난 2일에도 북방한계선 이남으로 속초 앞바다에 보란듯이 날리는 등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한·미·일은 안보리 결의를 정면 위반한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단합된 대응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러는 동안 정치권은 서울 청담동 술자리를 놓고 진실공방이나 벌이고 있고 이태원 참사를 두 번이나 우려먹는 책임 전가에 침을 튀기고 있다. 이쯤되면 국민들도 살 궁리를 해야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율곡 이이 선생은 선조에게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

행정가들과 정치인들의 안일함이 저변에 확대되었던 당시의 분위기에 이 같은 주장은 과잉반응이고 헛소리에 불과했다. “나라의 형세가 부실함이 오래 되어 앞으로 닥쳐올 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직무를 게을리 하여 세월만 보내고 무사 안일한 습관이 들며 화를 면치 못하리라” 이때 반대파에 있던 유성룡은 군대 일은 급한 게 아니라고 반대했고 얼마뒤 타계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이 지금의 임진강이 있는 파주에 화석정을 지었고 자연경관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1592년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난하다 화석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고 뒤에는 왜군이 쫓아오는 위태로운 상황에 화석정을 불태워 강을 비추니 겨우 피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픈 역사다.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된다면 안될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현대판 10만 양병설을 주장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7년간 피비린내 나는 대가를 치러야했고 이후 이같은 침략의 역사는 일본에게 36년간 휘둘리고 다시 남·북간의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모두 평화로울 것이라는 안일함 뒤에 찾아온 비극이었다.

6·25전쟁 포성이 멎은 지 대략 70년, 언제 다시 한반도 상공에 미사일이 비 오듯 날아다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오랜 평화의 시간이 지났다. 항상 안일함의 대가는 국민들 몫이었다. 이후로도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백령도에서 천안함이 피격 당했고 소중한 우리나라 군인들만 희생됐다.

율곡 흉내를 내자는 것도 아니고 예언가처럼 우월감에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전쟁은 과거처럼 총검술이나 육박전으로 싸우는 시대가 아니다. 한미 합동훈련을 빌미삼아 중국과 러시아를 믿고 시도 때도없이 미사일을 퍼붓는 북한의 행태를 보며 불과 2018년 4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前 대통령이 나란히 손잡고 판문점을 넘나들던 장면이 상기되는 건 어째서 일까.

서로 얼싸안고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친근감의 상징으로 선물 받은 풍산개는 하룻만에 정부관리로 이관됐다. 남북간의 평화의 상징이었던 곰이와 송강이는 청와대를 떠나 평산 마을을 거쳐 다시 국가가 관리하게 됐다.

이를 두고 문 前 대통령측은 정이든 반려동물이라 섭섭하지만 위탁 관계의 해지를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여당 대표는 반려동물 사진을 올리면서 관심을 끌더니 사룟값이 아까웠느냐고 비판했다. 남과 북이 화친을 맺던 당시만 해도 국내 애견인구가 1,500만이 넘는 점을 고려할 때 온통 평화분위기였다.

군사적 완화 분위기로 철통같던 국방 시스템은 해가 지날수록 크고 작은 변화가 왔고 군 내부에서도 우려를 표할 만큼 군의 사기는 추락했다. 장군들은 줄줄이 똥별이 되었고 인권을 빙자한 군기 문란은 걸면 걸리는 거미줄과 같아 몸 사리기에 바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북한에서는 언제 그랬냐는듯 대한민국 대통령을 향한 저질 비난을 일삼았고 보란듯이 바람맞은 지난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은 뭐 주고 뺨 맞은 형국이었다. 누굴 믿을 것인가. 각자의 안전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막상 전쟁이 터지면 가만 앉아서 당하던가 아니면 가까운 지하대피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두고 비상식량이나 방독면이라도 구입해 두는 것이 나름 예방책이다. 이쯤되면 숨을 곳을 찾기보다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것이 더 나을듯 싶다.

어차피 삼면이 바다인데 가면 어디로 갈 것이며 가더라도 목숨 부지한다고 장담을 못하는 것이다. 오늘은 13년 전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 해군 간에 한판 전쟁을 벌였던 날이다. 이른바 대청해전으로 불리는 이 해전은 2009년 11월 10일 오전 11시 27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서해상 대청도 동쪽 바다에서 남쪽 군사 한계선을 1.2 해리 월선하면서 시작됐다.

한국 해군은 5차례나 경고 방송을 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자 경고사격을 가했다. 경고사격이란 충분히 목표를 타격할 수 있음에도 주변을 향한 사격으로 일종의 엄포형태라 할 수 있는데 상대국인 조선인민군이 정조준 사격으로 응해 오면서 시작됐다.

약 50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이중 15발이 한국 해군의 참수리 325호 함교와 조타실을 타격했다. 이에 20mm와 40mm 함포를 4천발 발사, 조선인민군 해군은 반파된 상태에서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 해전을 대한민국 해군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조선인민군 해군은 8명이 사망했다.

쌍방간에 약 3km 거리를 두고 불과 2분간 벌어진 해전은 지금까지도 승리기록으로 남아있다. 제2의 대청해전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고려할 때 겁먹을 일도 없고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싸우자는 게 아니라 더는 북한과 재혼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달라도 너무 다른 부부가 이혼한 지 70년, 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더는 얽히지 말고 평화가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남북의 총구를 한데 모아 가까운 섬나라부터 빚을 갚아주면 어떨까.

국방이란 공격이 전부가 아니라 방어가 더 중요하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복무시절 지침이 새삼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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