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피카소의 작품 “도라 마르의 초상”과 “한국에서의 학살”이 주는 메시지, 중국의 남과 북에 대한 “이질 라바” 외교술에 대한 경고(警告)
[사설] 피카소의 작품 “도라 마르의 초상”과 “한국에서의 학살”이 주는 메시지, 중국의 남과 북에 대한 “이질 라바” 외교술에 대한 경고(警告)
  • 이찬엽 논설위원 pinetree0516@hanmail.net
  • 승인 2022.11.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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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엽 논설위원
▲이찬엽 논설위원

중국은 한국과 밀월관계를 꿈꿨다. 한국도 겉으론 중국과 이웃사촌 관계를 바란다. 바야흐로 중국의 행동은 “이질 라바 탁구채”를 연상케 한다. 즉, 중국도 실리추구 앞에서 맥을 못 췄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국민들의 원성” 때문이었다.

정상들은 외교 문제도 문제지만 각기 자국의 국내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트럼프와 비교하여) 바이든의 우유부단한 행동, 시진핑의 반 인류적 인권 탄압, 우리의 경우 이태원 참사 문제 등이 “통치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대외적인 문제보다 대내적인 문제로 시름을 한 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철없는 북은 만들어 놓은 미사일을 떡쌀 빼듯 심심할 때마다 쏘아 올리고 있다. 자신의 고립무원도 자발적이니 깨닫게 할 방도가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동아시아에서 하나만의 이상을 고집하는 국가로는 대만도 있다. 미국을 등에 업었다지만 언제고 중국의 침입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안보위협”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만 또한 북한과 같이 외톨이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즉시 하자면, 지금은, 양다리를 걸쳐야 겨우 살아남는 국제정세를 양국(북과 대만)은 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도 러시아와 중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동안은 나름대로 평화로웠고, 미약하나마 발전의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효과 없는 비합리적인 외교 노선을 고집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다만, 무기 수출 부문에 있어서는, 남과 북 공히 동시에 활기를 띠고 있다. 북은 러시아에, 남은 미국에 무기를 수출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군사 대국”임을 각각 자처했다. 최무선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러시아가 맨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 북한이요, 미국이 정의롭게 의지할 국가가 남한인 것을 보여 준 사례다.

“팔짱을 끼고 싶은 나라”가 북과 남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정상외교에서 중국은 남한에 팔짱을 끼려 했다. 갑자기 왜 그랬는가. “팔짱을 끼는 것”이 외교관례가 된 것이다. 국제문제와 국내문제를 연계해 보면, 작은 지자체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중소도시 간의 연대를 통한 경쟁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소멸될 지자체도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전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정상회교는 연대(連帶)의 자리였다. 각국의 정상들은 자국민의 눈치를 보기에도 버거운데, 타국의 외교 노선에 꿰뚫고 실익이 무엇인가를 촘촘히 따질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즉, 다각적인 생각으로 임해야 하는 “입체적 외교”였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입체파 미술에 해당하는 매우 복잡한 외교였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상상케 했다.

각 정상들의 만남에 있어서, 흥미로웠던 점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과 같은 다각적인 판단을 하는 정치가와 그에 기반한 외교가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정상들의 현주소는 전율감까지 들게 했다. “입체파 정치인과 입체파 외교 수장만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가능하게 했다.

조명해보자면, 윤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악수하는 광경을 보고 나니, 피카소의 “도라 마르의 초상”이 재현되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의 모습을 합해 놓은 듯한 도라 마르의 초상은 피카소를 미술계의 스타로 만든 걸작이었다. 그런데,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연인이었다. 당시, 윤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만남은 피카소의 작품처럼 연인 같이 포즈는 취했다. 그러나, 바라보는 곳은, 피카소 작품에서 나오는 눈동자와 매우 닮았다.

두 정상은 “성숙한 관계를 위한 협력”을 강조했고, 그건 북을 배제하고, 구체적으로는 북을 밀어내고, 남한이 중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형성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동상이몽일지라도, 지난번과 확연히 달라진 시진핑의 태도는, 다름 아닌 한미일의 결속에 따른 고립을 걱정한 까닭이었다.

중국이 강조했던 “일대일로 정책(신실크로드 정책)”은 별 효과가 없는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는 한국의 적극적인 의사에 힘입어 파괴력이 가중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 중국의 태도 변화는 불가피했다. 이러다 중국도 북한처럼 국제외톨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주석인 내가 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시 주석)가 후진타오나 덩샤오핑과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피카소의 작품 중 “파이프를 든 소년”은 기시다 일본 총리를 연상케 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거울 앞의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왠지 다시 젊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림 속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리고, 북의 김정은은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생각나게 했다. 

또한 “기타를 치는 눈먼 노인”은 북한 인민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었다. 피골이 상 접한 상태에서도, 수령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사면초가의 인민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오렌지 베레모를 쓴 여인”은 누구를 닮았을까. 지금 한 참 논쟁 중인 인물을 닮지 않았을까.

즉, 최근, 영부인의 팔짱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당사자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외교 결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거기다, 미국의 언론이나 정치계에서도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나무랄 일도 비판받을 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국내에서만 소란 중인가.

언급한, 피카소는 매우 자율적인 상태에서 예술활동을 즐겼다. 그가 추구했던 화려함의 뒤편에는 항상 자아에 대한 발견을 모색했다.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한눈은 옆을 봄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열정 뒤편에는 빈곤과 우울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극기의 모습도 있었다. 참 대단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충격적 사실이지만, 피카소는 공산주의 계열에 몸담았던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의 학살”은 미국에 의한 학살을 지목한 그림이었다. 즉, 황해도 신천 대학살을 비판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피카소의 착각은 한국의 실체를 모르는 상상에 의한 것이었다. 피카소가 민주주의 신봉자였었으면 좋았으련만. “도라 마르의 초상”에 대한 작품에서 시진핑을 연상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즉, 그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극한 대립에 의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학살을 초래했다는 점을 간과했다. 다만, 피해자가 주로 여인과 어린아이였다는 점은 피카소의 그림과 일치했다. 이념의 대립과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가 누구인가를 명백히 보여준 것은 업적이었다. 

신천대학살 사건은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말하지만, 북에서 주로 쓰고 있는 용어다. 남한에서는 10‧13 반공의거라고도 불렸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우리 민족 간 즉, 우익과 좌익 간의 이념적 갈등에 의한 피해였다.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이 씨앗이 된 사건이었고, 북의 토지개혁에 따른 월남 및 은둔, 복귀를 통한 무차별 살해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처럼, 속내를 숨기고, 또 숨겨도, 한 눈은 앞을 바라보고 있어도 다른 눈은 옆을 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관계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암울한 심경마저 든다, 그렇다면, 파티를 가장한 “입체적 외교전쟁”의 끝은 어디일까.

특이한 것은, 감정의 골이 깊었던, 중국이 현 정권에 이르러 “이질 라바 외교술”을 또다시 구사했다는 점이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다시 한번 역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16억의 수장이 5천만의 수장 앞에서 왜 “흥미로운 자세”를 취했는지를 즉시 해야 하고, 경계와 화해라는 입체적 실리외교의 방향을 바로 잡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겐 필요할 것이다.

이찬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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