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연평도 포격전 12주기 고인의 명복을 빌며
[덕암칼럼] 연평도 포격전 12주기 고인의 명복을 빌며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1.23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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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연평해전은 분명한 북한의 남침이었고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표적 삼아 무기를 사용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한 전쟁일진대 국어사전을 보거나 모든 관련 자료를 다 찾아봐도 연평도 포격전이라 하지 해전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필자 또한 모든 문서가 그러하니, 연평도 포격전이라 칭하고 12년 전 오늘은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한 날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서북쪽 어느 섬에서 일어난 일 정도로 치부하고 이제는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지만,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해도 지금같은 망각의 소재로 그쳤을까.

장소에 따라 부각되는 상황이 다르다면 서울시민은 국민이고 연평도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자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이 아무런 선전포고나 징조도 없이 옹진군 연평면의 연평도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북한의 개머리와 무도라는 작은섬에 설치된 포병부대가 약 170발의 선제공격에 나섰고 한국군도 약 80발의 대응사격으로 받아쳤다.

지휘관으로는 한국군이 이홍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이 나섰고 북한에서는 조선인민군 4군단장인 김격식 대장이 앞장섰다. 주요 무기로는 한국군이 K9 자주포 3문과 KF-16, F-15K, 전투기가 각 4대씩 8대를 동원했으며 북한에서는 평사포, 대구경포와 함께 Mig 23기 5대가 출격했다.

육·해·공군이 연합해 남북한의 전쟁위기를 실전으로 맞이한 당시 상황은 매우 살벌했다. 국지전에서 언제 동시 다발전인 전면전으로 확대될지 예측이 안되는 형국이었다. 이 전쟁으로 아군 2명 전사, 16명 부상, 민간인 2명 사망, 3명 부상, 북한에서도 약 5~10명의 사망과 20~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야 어쨌든 남과 북 사이에 멎었던 총성이 다시 울린 건 사실이다. 군인을 포함한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배경이 된 전말을 되짚어 보자. 당시 제17대 대통령이었던 이명박 前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어떤 관계였을까. 앞서 2007년 1월 4일 노무현 前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선언이 2008년 2월 2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거의 무시되던 시기였다.

임기 내내 북한과 갈등을 벌여왔던 이명박 정부는 출범이후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합쳐 외교통일부로 개편하겠다며 말이 통폐합이지 실제로 통일부를 폐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를 감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국가간의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물론 통일부 해체는 실패했지만 이에 대한 반감은 고스란히 2008년 3월 26일 남북회담 본부에서 열린 업무보고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모두 뒤집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찌 되었든 애써 쌓은 남북한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앞서 10·4 정상선언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건설, 조선협력단지건설,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철도 개·보수 등 굵직한 협력 사업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있었다.

모두 물거품이 됐다. 이명박 前 대통령은 과거처럼 하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와는 다르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10년 안에 북한주민 1인당 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주겠다고 큰소리치자 북한에서는 이명박 역도 운운하며 욕설로 응답했다.

북한은 이같은 이명박 前 대통령의 주장이 반민족 궤변이고 반통일적 망동 이라며 용납 못할 도발로 간주했다. 그후 4개월 뒤인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장전항 해수욕장을 산책하던 한국의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정부는 즉각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켰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을 만나 유감을 표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단호한 조치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 남북한의 화해 물결은 2008년 6월 2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하면서 겨우 얻어낸 적성국교역법 적용 해제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무용지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왕자 씨 사망사건 이후 약 5개월 후인 2008년 12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은 하나 마나였고 그렇게 갈라진 남과 북의 대립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했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서남쪽 1.8km 해역에서 천안함이 수중 폭발로 침몰했고 이 사건으로 해군 장병 46명이 전사했다. 불과 두 달 뒤인 5·24 대북 제재로 개성공단만 남기고 모든 협력사업은 중단됐다. 한창 고공행진을 하던 개성공단의 민족대화합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참사였다. 다시 말해 연평도 포격 사건은 그냥 벌어진 게 아니다. 이미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60돌열병식에도 참석지 못할 만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2010년 9월 28일 20대 아들인 김정은에게 3세 후계를 공식발표하자 이명박 前 대통령은 이를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예단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2010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통일에 대해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예상과는 달리 젊은 김정은 위원장이 2022년 11월 지금까지 버티며 건재함을 보란듯이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날리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판단이 남북 민족화합을 아예 물 건너 보낸 것과 같은 꼴이 됐다.

남북한의 사랑탑이 무너질 동안, 한 사람의 판단 오류가 민족간의 화합을 백척간두로 몰아갈 동안 대통령의 측근들은 뭘 했으며 언론은 뭘 했던가. 연평도 포격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 또 다시 같은 일이 생겨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승인없이 총 한 발도 못 쏘는 나라에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운명을 달리한 대한민국 국군과 국민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며 더 이상 죄없는 국민의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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