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백의 행복보다 하나의 슬픔을
[덕암칼럼] 백의 행복보다 하나의 슬픔을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1.2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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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백 명이 행복하다면 살만한 사회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 명의 슬픔을 외면하는 사회는 진정한 복지국가라 할 수 없다. 자본주의 특성상 가난을 나라가 구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보편적 복지라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인데 이 3가지가 어렵다면 그 사회는 복지시스템을 점검해 봐야할 필요성이 있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여학생의 생리대 무상 보급에 대해 어필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 제주에서 그러한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다 싶었다.

한 발 더 나가자면 각 개인의 피부 트러블까지 감안하여 세분화된 공급이 따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 같은 제도 시행에 그리 많은 예산이 들지 않음에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던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시행된다면 우리 미래의 인재들을 출산할 귀한 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어제 아침은 갑자기 떨어진 수은주로 인해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지구온난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덜 추우니 외려 낫겠지만 패딩이 안 팔린다고 힘들어하는 의류업계에는 안 된 일이다. 이렇듯 날씨조차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도움될 수 없는 것인데 국민들을 게으름에 매우익숙하도록 복지라는 명분으로 열정과 의지를 상실케 해놓고 허술한 정책이 빚은 처참한 공백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통령 선거전 필자가 공약했던 사항 중 하나가 행정복지센터에 최저 수준의 무상급식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누구든 밥은 굶지 말아야 하며 보급형 치약과 화장지를 공급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단전·단수된 가정마다 최소한의 기본생활이 가능한 범위내에서 복지 예산을 편성하자는 것이었다.

대략 28만 가구의 단전가구는 어제처럼 추운 날 전기장판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이불을 돌돌 말아 추운 겨울을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게을러 일하지 않고 머리만 굴리는 얌체족속들이 이런 복지예산을 제도권 입맛에 맞춰 서류만 갖추고 타 먹는 경우도 많겠지만 정작 필요한 복지 사각지대 서민층들은 제도권 활용에 대한 방안조차도 알 수 없다.

필자는 백 명의 행복보다 한 명의 불행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지난 26일, 인천의 빌라에서 10대 형제가 사망하고 부모도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고3 학생인 19살 큰아들이 학교에 결석하자 교사가 신고함으로써 119가 방문하여 확인된 것인데 17살 동생과 부모가 모두 안방에 누워있었다.

기초수급자도 아닌 만큼 복지 사각지대였다. 9번이나 고쳐 쓴 유서에서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생활고에 지친 대한민국 국민의 현주소였다. 그 전날인 25일에도 서울 서대문구에서 전기요금과 월세가 밀린 모녀가 사망한 채 발견된 바 있다.

1년 2개월째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고 휴대전화 6개월, 5개월째 전기요금까지 못 냈으니 연체료에 독촉도 받았을 것이고 외부에서 작은 관심만 가져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 관할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했지만, 타 지역으로 전입신고를 했던 터라 방법이 없었다는 후문이다.

어머니는 65세 딸은 36세였다. 과연 이 두 사건이 대충 지나칠 일인가. 저수지의 둑이 무너질 때는 조짐이 있다. 쩍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늦기 전에 물을 빼고 보수를 해야만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앞서 거론하였듯 행정복지센터별 무상급식은 놀고 먹는 사람들의 호의호식 만찬을 마련하자는 게 아니다.

최소한 사람이 밥은 굶지 않도록 멀건 된장국에 쌀 소비 축소로 남아도는 양곡의 일부라도 할애할 것을 전제했다. 과거 1차 산업 중심의 사회구조는 극심한 가뭄에 농사를 짓지 못해 흉년이 위험했다. 지금은 4차 산업이 지배하다 보니 돈 가뭄이 물 가뭄보다 더 위험한 원인이 됐다. 자고로 정치란 백성의 작은 아픔을 헤아리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한밤중 임금이 평민 복장으로 저잣거리를 다녀봄으로써 민심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권력이란 자리만큼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책임감이 동반하는 것이며 마음가짐부터가 국민을 섬기는 근본이 갖춰지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부터 이어오던 당파싸움에 배겨날 임금도 없었지만 돌이켜보건대 나라의 태평성대는 임금의 됨됨이가 반듯하고 지혜와 덕망이 넘칠 때 가능했었다.

정조가 그랬고 세종이 그랬으나 연산군이 말아먹고 겁 많던 인조가 그 잘난 옥체를 보존하시느라 수 십 만명의 조선 여자를 조공으로 바친 역사가 있었다. 지난 대통령선거는 누가 더 훌륭한 후보를 찾기보다 누가 덜 나쁜 후보였느냐를 선택하는 선거였다. 이미 여론조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고 선거 후유증은 예상대로 국민들간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전쟁으로 불거지고 있다.

거기에 노조의 파업이 맞불을 붙이자 나라 꼴은 갈 대로 가자는 것이나 진배없다. 지난 26일에도 주최측 추산 26만 명이 윤석열 퇴진을 외치며 서울 광화문 거리로 나섰다. 159명의 ‘10·29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취합해 보면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 형국이다.

언제부터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놓고 이렇듯 열정적으로 나섰을까. 조용히 각자의 직분을 지키는 절대 대수의 국민들의 생존권까지 흔들고 현장 경험이 전무한 공무원들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비현실적이고 이론적 대안에 윗사람들 눈치 보느라 할 말을 못하는 아부꾼들이 일을 더 커지게 만들고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굶어서 사망 직전에 가 본 몇 차례의 경험과 화물연대가 왜 화주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는지 화물차를 수년 간 운영해 본 경험을 토대로 하자면 당사자들의 싸움은 당사자들만의 환경이 있는 것이다. 국민이 더 죽어 자빠지든 파업으로 인해 연쇄부도가 나든 당사자가 되어 본 경험자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만 반복할 뿐 저수지 둑이 무너져 봐야 알게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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