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
[덕암칼럼]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2.07 08: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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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1985년 가수 이광조가 발표, 1986년 히트 한 이광조 작사 이태열 작곡의 노래 제목이다. 가사 중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 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남녀간 사랑을 노래한 말인데 이 말이 작금의 시대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건 왜 일까.

상대성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일까. 평소 무감각하던 주변 사람이 어느 날 안보일 때 되어서야 그 빈자리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인연이든 만나고 헤어지며 다시는 못 볼 것 같아도 다시 만나는 게 인연이다.

이런 인연을 알고서 했던 말인지 몰라도 시인 한용운 은 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했던가. 많은 만남 중 가장 소중한 인연이라면 첫째가 부부간의 만남이다.

그래서 0촌이라 한다. 다음이 부모·자식간의 1촌, 형제간의 2촌, 부모 항렬의 형제는 3촌, 외가라면 외3촌 그의 자식이면 사촌이거나 외사촌이 된다. 다음이 조부모 항렬이면 5촌이고 5촌의 자식이면 6촌간이 된다.

어려울 것도 없고 쉬운 계산법인데 이제 얼마 못가 이런 촌수마저 뭔 소리냐는 소리를 들을 시대가 곧 된다. 밥도 못하는 박사 출신의 며느리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시부모가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 잘해야 둘만 낳은 세대들이 하나만 낳고 신줏단지 모시듯 했으니 아랫대가 남을 리 없고 그러한 연유로 사촌·외사촌이 없으니 고모·이모가 있을리가 없다.

한해 두해 지날수록 까다로운 어르신 대신 주는 대로 먹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개와 고양이가 편리하니 시부모 자리에 모셔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부모님 문상에는 지금이니까 그나마 사람이라도 오지 조금 더 아니 십년만 더 지나면 사람조차 아니 오고 잘해야 조화에 부의금 계좌에 10만원이라도 꽂힌다.

10년 더 지나면 그나마도 없다. 외려 청첩이나 부고장을 보내는 자체가 욕먹을 일이 된다. 반면 키우던 개나 고양이가 혹여 돌아가시면 얼마나 슬프냐고 격려 카톡이 넘치고 SNS를 통해 위로 이모티콘이 난무할 것이다. 그래야 유족의 마음을 살 것이고 사람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자체가 촌스럽고 구시대적 발상으로 취급받는 날이 올 것이다.

아닐까. 누가 감히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돌이켜 보건대 아니다 싶으면 힘겹겠지만 다시 돌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자산은 자원도, 군사나 경제, 문화예술이나 관광도 아니고 오로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현존하는 예절이다. 윤석열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여성가족부나 통일부를 해체하고 국민윤리부를 설치해야 한다.

가만 두면 알아서 합쳐질 멀쩡한 남녀를 구분짓고 김정은 국무위원장 헛기침이면 애써 세워놓은 정책도 무용지물인데 무슨 예산을 낭비하는가. 정히 반려동물이 필수불가결한 현실이라면 보건복지부 산하에 반려국을 신설하고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람의 존재가치를 명확히 해야 한다.

아니면 지금처럼 사람과 동물의 존재가치가 불투명해지는 현실을 방치한 대가를 치르게 될 공산이 크다. 점차 부모·자식간의 이질감이 커지고 있다. 오로지 경제적 유산가치나 요양원 입원비에 대한 계산성이 대두되면서 부모가 자식에 대한 기대감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잊으려 할 때 자식은 모른다.

반면 낳고 키우며 마냥 들떠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잊어야 하지만 그럴수록 그 그리움은 커진다. 남녀 간의 사랑이면 쉽게 잊을 일도 혈육이다 보면 그리 쉽지 않은 것이며 작금의 시대에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원인을 알고 보면 가장 먼저 당연한 것으로 참고 살았던 주부들의 심리적 충동질이다.

충분히 인내할 수 있었던 부분도 이혼이나 시부모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키며 어떡하면 한 푼이라도 챙길지 연구하는 주부가 현명하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냥 그러려니 하고 살던 평범한 주부도 나만 바보 되는 것 아니냐는 심리적 피해의식이 발동되면서 문제는 가족해체라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공정, 이해, 상식을 전제로 여성들의 피해의식에 반항심을 충동질하는 이론적 합리화의 공식이 등장한다. 마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는 위로와 지금까지 가슴에 얼마나 응어리졌는지, 혹여 허물이 있다면 그게 별개 아니고 외려 문제 삼는 남편만 문제라는 일방적 변론에 몰입한다.

제 아무리 의견이 달라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의견은 양쪽 다 들어봐야 아는 것일진대, 어느 한쪽의 말만 방영된다. 굳이 특정 프로그램을 전제하지 못하지만 이런 방송매체의 시청률 욕심이 현행 방송윤리법을 교묘히 피해 가며 반사회적 악재작용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노래 가사 중 점점 멀어져 간다는 가사가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 중 한 대목인데, 이렇듯 세대 간의 격차가 다시 회복될 수 없이 차츰 멀어져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러하다. 노래 가사의 시대적 배경이나 내용, 의미는 무관하더라도 가사만 빌리자면 지금의 2030세대가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도 희망은 점점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으니 과거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포기하고 체념하며 전 세대들에 대한 원망과 세대차이로 인한 이질감이 대화나 소통보다는 자체 SNS로 국한된다. 차이가 점점 멀어져 간다. 이해의 폭이 점점 멀어져 간다. 몇 시에 잠을, 잠자리에서 일어나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먹을지 하루해가 지나면 집에 언제 올 것이며 와서는 뭘 할 수 있는지 아무런 대안이 없다.

기와집보다 단독주택, 그보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아파트, 단독주택에서 오피스텔로 주거환경 마저 변해간다. 이제 사회적 인프라 보다는 개개인의 기질이나 생존전략이 더 인기를 끌 시대가 됐다. 점차 사회가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정이 넘치고 서로 배려하는 심성이 충분한 국민이기에 우리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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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주 2022-12-07 16: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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