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세월이 지나도 대우받지 못하는 역모
[덕암칼럼] 세월이 지나도 대우받지 못하는 역모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2.12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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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잘 하면 혁명이고 못하면 반역이다. 역모죄는 조선시대에도 가장 엄한 극형에 처해졌으며 이를 도모하려다 발각되면 3족을 멸하는 형벌이 가해졌다. 심지어 죽은 자의 무덤도 파헤쳐 두 번 벌하는 부관참시도 내려질 만큼 역모나 반역의 종말은 비참하다.

하지만 잘해서 성공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엄청난 권력도 쥐게 되고 함께 도모했던 측근들은 물론 이래저래 주변의 3족이 떵떵거리며 잘살게 된다. 힘없는 자의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 했던가. 권력을 가진 자는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제 아무리 정의를 외치는 자라도 칼날을 잡고서는 이길 수가 없었다.

한번 기득권을 잡은 자의 권력 유지에는 많은 국민들의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삼청교육대가 그러했고 평화의 댐이 그러했다. 막대한 예산과 육체적 희생을 강요당한 군사정권의 본색이 드러난 드라마였다. 삼청교육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 될 무렵 국민들의 군기를 잡을 명분이 사회 정화 운동이었다.

범죄자를 소탕하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미명하에 대놓고 잡아 들였다.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총 6만755명을 영장없이 체포하여 군부대로 이송, 개잡듯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던 시절이었다. 매 앞에서 장사 없다. 일단 패고 두들기는데 누가 감히 덤빌까.

국민들에 대한 군기잡기, 지시에 따라 몽둥이 찜질을 해야 하는 군부대 조교들, 아이·어른 할것 없이 맞은 사람은 많은데 팼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역사적 과오가 과연 앞으로도 없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다. 얼마든지 발생할 여지가 있다.

훈련이라는 과정속에 사망한 사람도 54명이었으며 삼청교육대 자체가 불법이고 인권유린이었다는 보고서는 약 10년이 지난 2007년 발표됐다. 그동안은 입 다물고 있어야 했다. 다음 평화의 댐은 또 어떤가. 필자가 육군 병장으로 전역하던 1987년부터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던 1988년까지 약 15개월 만에 축조된 댐이다.

초등학생 코 묻은 돈까지 모두 모아 바치던 촌극이었고 북한의 물폭탄이 서울을 초토화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럴싸한 영상까지 상영됐다. 한마디로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온다고 겁박하니 온 국민이 벌벌 떨며 공포분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당시 토목전문가들이나 북한 당국에서는 왜 함구했을까.

물폭탄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국민들 가지고 놀았음을 알면서도 왜 조용했을까. 역사는 훗날 이렇게 기록한다.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을 건설해 200억 톤의 물로 남한의 수도 서울을 공격한다는 시나리오다. 이날 발표한 건설부 장관도 명확히 하자면 허위 사실 공표죄에 해당된다.

63빌딩까지 물에 잠기는 영상, 유명한 교수들까지 그럴 가능성을 설명했으니 이 또한 공범들이다. 이런 시국에 누가 감히 집회 시위를 할 것인가. 물리적으로 북한은 소양강댐의 10배나 되는 금강산댐을 처음부터 건설할 수 없음을 알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를 건설하려면 적어도 27년은 걸리며 올림픽 방해 운운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 정도 물을 가두려면 댐 위로 북한 땅도 상당 부분 수장되어야 가능했다. 총 공사비 1,700억.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통째로 드러난 거짓말이 아무런 처벌도 없이 대충 넘어갔다. 왜일까. 그런 대형 사기극을 치고도 왜 사망하는 날까지 떵떵거리며 골프치고 온갖 경호를 받으며 종신토록 잘 살 수 있었을까.

따져야 할 부류들이 함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지 않고서야 조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이다. 위의 두 사건 외에 여러가지가 많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벌어져도 괜찮았던 이유는 권력의 상층부였기 때문인데 군인이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 정치인도 아니면서 정치권에 들어앉아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조직인 하나회가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무원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공복인 만큼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작금의 사태를 보면 여전히 국민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가 오늘은 12·12사태가 발생한지 42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필자도 고교 1학년 재학 중이었고 학교에서는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며 함구령을 내린 바 있다. 1979년 12월 12일 역모를 일으킨 전두환과 일행들이 정한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 이날의 거사가 성공하면서 대한민국 역사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한 나라를 말아먹을 범죄가 국민세금으로 손에 쥐여 준 총으로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것이다.

용산의 국방부 헌병대, 아군끼리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반역과 나라를 지키는 주역간의 총격전,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고 대통령까지 승인을 받아내려는 목표는 성공했다. 서울 경복궁 수도방위사령부, 연희동 잔칫집에는 전두환에게 신경 쓰이는 지휘관들을 초청해 동선을 확보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공관과 최규하 총리 공관도 사전 포석의 장소였다. 훗날 1996년 12월 16일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원 노태우는 징역 15년에 벌금 2,626억 원이 추징됐다. 물론 1년만인 1997년 12월 22일 둘 다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만 역사는 말한다. 그렇게 죄없는 국민들 괴롭힌 죄는 죽어서도 죗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러하던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前 대통령이 피살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전두환은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으며 함께 공모한 노태우가 재임한 1988년부터 1993년 초까지 12·12사건은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다.

세월이 지나 전두환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노태우 前 대통령, 그의 딸 노소영 씨도 SK 최태헌 회장과 결혼했다가 최근 건국 이래 가장 큰 액수의 위자료 문제로 법의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역사는 말한다. 아니 기록한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선의 부패는 소금이 염기를 잃을 때 시작된다. 아니면 제2의 삼청교육대는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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