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는, 토사구팽이 대유행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유사(類似) 토사구팽이 유행 중이다. 토끼를 잡은 후 사냥개를 잡아먹었던 과거의 통상적인 행동과 전혀 다른, 파양(罷養)형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 빈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동료를 파양한다든지 개들까지도 파양하는 경우가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개를 큰 집(동물원)으로 보내는 일이 다반사다. 첩첩산중, 자신은 어떠한 책임도 없으며, 당해 책임에서 쏙 빠져나가 한가로워지길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죄를 짓고도 법을 무시하는 파렴치가 많다.
국민에게 무례한 자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법치국가가 유지되겠는가. 머지않아, 법무부와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 명백하다. 정계에 또 한 번의 교도소로 가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악연 끊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어제의 절친이, 어제의 동지가, 어제의 가족(개)이, 황당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것은, 하나의 선을 명백히 긋는 방법에 의하여, 아니면, 무 자르듯 두 동강이로 만드는 방법에 의하여, 완전히 과거의 잘못이 단절될까. 필자는, 오늘의 주인공들을 멀리서 주시해 왔었다. 그들 중에는 4각의 두상을 가진 수염을 기른 노인도 있었고, 배우와 염문이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인상적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동시에 거머쥔 몇 안 되는 소설가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특히,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많은 예언을 하게 한다. 그는, 노인과 바다에서,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패배를 모르는 의지적 행동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노인과 바다를 통하여, 인간의 도전이 끝이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물론, 종전의 작품세계에서인 “무기여 잘 있거라”와는 거리가 먼, 매우 섬세한 인간의 심리적인 측면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대단히 모순되게도, 그가 사랑하고 열정적인 작품활동을 한 곳은 “공산 국가 쿠바”였다.
한국판 헤밍웨이와 닮은 꼴이었다. 그에게, 심리적 갈등이 깊어질수록, 쿠바는 창작활동의 넓은 공간을 선사했다. 한국판 헤밍웨이가 동경하는 곳도 과연 그럴까. 상기 작품은, 80여 일간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를 극복한 한 노인의 역경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자신의 주관이 아닌 “객관적 입장”에서 기술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판 헤밍웨이”의 편협된 사고는 언제나 고쳐질까. 그(헤밍웨이)는, 소설이 아닌 일종의 전원시에 가까운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20세기를 대표하게 됐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쓴 헤밍웨이는, 의지력이 강한 노인을 통해 “자신의 정상적 의지“를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미국 땅을 버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불안한 쿠바에서의 집필활동을 통해 자신에게 닥쳐오는 마음의 병(우울증, 알코올 중독)을 치유하고자 했다. 글 속의 노인은 사투를 벌이면서도, 작가의 절제를 통해, 거칠지 않은 사투를 묘사했다. 헤밍웨이의 마음은, 한국의 “이름 모를 선사”처럼, 깊은 산 속에서 수련하고픈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왜 이러한 “큰 시련과 업보”가 원초적으로 쌓였을까? 이게, 그의 고뇌였을 것이다. 비교하여, 한국판 헤밍웨이의 업보 또한 얼마나 큰가!! 그대로 되갚음을 당해도 할 말은 없지 않은가!! 그(헤밍웨이)는 역설적 모습을 보였다.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감을 작품에서 대변하려 했다.
그의 작품 중 “무기여 잘 있거라”가 “남녀상열지사”였다면 “노인과 바다”는 “아빠의 청춘”이었다. 노인이 천신만고 끝에 잡은 청새치(다랑어)는 아무런 저항 없이 거친 상어떼의 밥이 되고 말았지만, 헤밍웨이는 역설적으로 만족을 했다. 그것은 일종의 다랑어에 대한 “토사구팽”이었다. 일종의 개를 파양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노인과 다랑어는 어느새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실상 상어떼의 공격으로 인한 슬픔은 그리 크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포획에 대한 만족으로 슬픔은 덮혀졌다. 머리와 등뼈만 남긴체 죽어가는 다랑어는 일종의 토사구팽을 당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노인에게 있어서 고난의 극복은, 오로지 그의 관록과 평화로움의 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한국판 헤밍웨이도 그런가. 노인과 바다에서의 노인은, 자연과 하나가 되길 원했고 그것에는 다소 순순한 마음도 작용했다. 종전 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추구했던 자유 유지 및 정의구현 정신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2차대전 당시의 사회상과 1950년대의 사회상은 엄연히 달랐기 때문에 헤밍웨이 자신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그의 “슬럼프”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한 것이었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10여년 이란 긴 세월의 슬럼프는, 한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소설가로서는 참아 극복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상어는 직접적으로 노인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어느새 물고기(다랑어)와 노인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앙상한 뼈만 남은 생선(다랑어)이었다. 허나, 그 때에도, 노인은 아주 건장한 자신의 젊은 시절(현직, 권좌)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허무하게 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말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당시, 자신(헤밍웨이)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과오 때문에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자살에 이은 자식의 비극적 자살은 또 다른 업보였다. 우리의 경우, 정치인 중 “우울증” 때문에 유명을 달리한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예사롭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작품에서, 자신은 노쇠하였고 정신적으로 흔들렸지만, 노인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면면이 드러났다.
특히, 필체가 간결한 것도, 복잡한 인생사를 잊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대장동 사태에서의 꼬리 자르기와 기르던 “개”를 동물원에 파양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처사다. 그 개는 어디서 왔는가? 개를 입양시켜 준 사람(북)은 미워도, 파양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또한, 대장동 사태의 주범도 수사의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여, 수족을 잘라내려는 처사는 무책임한 행동이며 토사구팽의 행태 아닌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집에서 기르는 짐승 특히, 개나 소는 식구나 다름없이 여겼다. 즉, 이런 풍토가 미풍양속이었다. 따라서, 작금의 현실에 씁쓸한 마음이 일뿐이다. 토사구팽과 꼬리 자르기로, 거짓을 진실로 탈바꿈시킬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한 생각이다!! 앞서 말한, 큰 집(동물원)으로 간 그 개는 통일의 상징 아니었던가. 그리고, 대장동 개발의 핵심은 몇몇이 공모하여 수익을 불법적으로 확보한 것과 수분양자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재정적 부담을 안겨준 사건 아니었던가.
지금은, 서서히, 2022년의 “검은 호랑이의 해”가 지고 있고, 어느덧 2023년 “검은 토끼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 검은 호랑이나 검은 토끼는 외양만 검을 뿐 속까지 검지는 않다. 이걸 본보기로 생각한다면, 형사사법기관은 “검은 속(죄)”을 철저히 파헤쳐, 밝은 내일을 국민이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길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거사들의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죄)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를 꾸짖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