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평화는 지키는 자의 몫이다
[덕암칼럼] 평화는 지키는 자의 몫이다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2.12.1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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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이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 뿐인 소중한 생명인데 죽고 싶은 사람은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돌아보면 원치 않은 전쟁이나 내란으로 처참한 현실을 겪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당장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그러하고 시리아 내전으로 힘든 사람들이 그러하다. 우리라고 늘 지금처럼 호강하고 사는 것은 아닐진대 한때는 36년간 일제강점기도 겪어봤고 그 이전에도 지리적으로 한 세기가 편한 날이 없었다.

특히 가까운 일본은 잊을만하면 현해탄을 건너와 온갖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또 어떤 때는 조선을 통과해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날도 많았다. 남의 땅을 통과하면 통행세를 내도 시원찮을 판에 그냥 안 지나가고 할 수 있는 못된 짓을 다 하고도 모자라 대대손손 정신적 종속관계로 만들어 놓는다.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 일부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하는 얍삽한 짓을 보면 할머니가 일본인의 씨를 받아 출산하였음이 불보듯 훤할 지경이다. 언젠가 태국을 여행하다 가이드에게 들은 말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을 통과하면서 안 건드릴 테니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얻은 것이 지금의 태국 고속도로라는 것이다.

약아빠진 일본은 도로이용에 필요한 자동차를 공급했고 지금 와서 현대와 삼성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지 못한다는 전언이다. 그런 일본이 군사대국이었을 때 지금의 중국을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85년 전 오늘 12월 13일 발생한 실제 사건이다.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이 1937년 12월 13일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고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비 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 중인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됐다.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30만 명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재학시절 전교생이 600명 정도 된다면 그 정도 인원이 운동장을 가득 메울 수 있다면 상상이 갈까. 그런 인원이 500배나 되는 모습이다.

항복한 중국군을 대상으로 총검술 훈련을 하거나 살상 훈련의 대상으로 삼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석유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하였으며,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겁탈한 후 살상하기도 했다. 총알을 아낀다면서 생매장을 하기도 했으며, 수녀와 비구니, 임신부를 가리지 않고 겁탈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난징에 거주하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시작된 대학살은 6주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938년 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 되었다. 중국은 학살이 시작된 12월 13일을 추모일로 정하고,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기념관을 건축하며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2015년에는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징 대학살 관련 기록 16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난징이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떤다. 어른을 섬기는 효 사상이 상당히 발달한 본토인들의 특성상 조상들에 대한 앙갚음의 감정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시점에 중국은 점차 군사 대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은 다행히 잊으면 되는데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났는지 신사참배나 자위대 군사력 증진에 몰두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소유한 플루토늄으로 얼마든지 핵무기도 만들 수 있고 친분 있는 북한의 핵무기 발사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어쩌랴. 전범국가라는 오점을 남긴 상태에서 괜히 머리통 내밀었다가 좋은 일 없을 것이고 오늘처럼 난징 대학살로 조상들의 제사라도 올리는 날이면 더욱 조바심을 내야 맞는 것이다.

물론 후손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마는 적어도 일본 정부가 매를 사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할 일이다. 이쯤하고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이 난징뿐일까. 유태인 학살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뜬다. 필자는 어떤 글이든 쓰는 분량의 몇 배는 익히고 배워야 하니 자연스레 전쟁의 뒷모습을 세심하게 엿보게 된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계획적으로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사망한 유대인은 약 6백만 여명인데 어린이 약 백만 명,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집계됐다. 살인방법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잔인했다.

또 전쟁 기간 중에 2백10만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또 하나의 사건을 들자면 킬링 필드라는 단어가 있다. 미군의 폭격을 포함, 최대 17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인데 킬링 필드는 죽음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폴 포트를 필두로 시아누크를 쫓아내고 정권을 잡게 했는데 폴 포트는 집권후 지식인과 성직자를 포함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고 최대 170만 명까지 수치가 다양하며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미군이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추가로 60~8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주범이었던 폴 포트는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위의 두 사건 중 첫째와 둘째는 전쟁 중에 발생했지만 셋째는 내란으로 겪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과거사를 엿보면 적잖은 참상을 겪은 바 있다.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호강에 넘친 나라다. 괜히 누리는 호강일까.

목숨 걸고 나라 지킨 순국열사들의 혼으로 물려받은 후손들의 호사를 이대로 더 지킬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게 나라 지키려던 분들에 대한 예의이자 살고 있는 현세의 당연한 자산이며 후세에 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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