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공익 제보와 고자질의 차이
[덕암칼럼] 공익 제보와 고자질의 차이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3.06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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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약 50년 전 필자가 초등학교 재학 시절 교실의 칠판에는 큼지막하게 ‘떠든 사람’이라고 적힌 제목 아래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이 줄줄이 적혀있던 날들이 있었다.

세월이 더 흘러 중학교 재학시절에는 반장이 담임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권한을 갖고 있었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논픽션이었다.

같은 동급생끼리 서로 안 맞으려고 친구를 고자질하는 살벌한 분위기, 폭력 앞에 비굴한 인간성 말살의 현장이 극에 달하면서도 감히 누구 하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했다. 양들의 침묵 속에 늑대는 안심하고 군림할 수 있었고 천천히 마음 놓고 두고두고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대기업에 임원으로 출세해도 동창회조차 참석 못 하는 과거의 영웅이 됐다. 고자질은 특정인의 허물을 일러바치는 행위이면서도 반대급부에 이익이나 편익을 담보로 하는 것이므로 비굴함이 전제 되어야 한다.

남을 어렵게 하는 만큼 자신은 편해지는 것인데, 본디 문제점을 찾아 잘못한 만큼 벌을 주는 관리자가 해야 할 일임에도 이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가함으로써 관료는 편하지만, 백성들 간에는 서로 이간질하며 미워하게 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고자질과 일러바치기가 직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아예 대 놓고 파파라치 방법과 보상금 수령에 대한 절차를 강의해 주는 학원이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뭐하랴.

당초 취지와는 달리 남이야 죽든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안일한 사고에서 비롯된 파파라치, 같은 모양인데 전혀 색깔이 다른 공익 신고와 겹치면서 우리 사회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분열과 갈등의 도가니가 끊이지 않고 있다.

원래 파파라치는 정치인, 연예인 등 대중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을 대상으로 몰래 사진을 찍는 사진사를 의미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반인의 범법행위 장면을 몰래 찍어 행정기관 등에 신고 목적으로 제출하는 사진사로 변질한 것이다.

과거를 거슬러 보면 2001년 3월 교통법규 위반 신고보상금제가 도입되면서부터 자동차와 파파라치의 합성어인 카파라치가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쓰레기 불법투기를 신고하는 쓰파라치, 학원의 불법영업을 신고하는 학파라치, 약국의 불법사항을 신고하는 약파라치 등 법규를 위반하는 모든 분야로 확산하자 이제는 서로 눈치를 보고 신고하는 경계와 불신의 위험한 상황들이 빠르게 번졌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누구든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의 조장은 감히 누구도 지적하지 못하다 보니 법을 정하는 사람의 결정이 곧 법이 되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

약 30년 전만 해도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보면 맞은편 방향에서 오던 차량이 상향등을 번쩍거리며 교통단속이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를 전해주고 가는 차량 또한 오는 차량에 같은 안내를 해주는 훈훈한(?) 인심의 국민 정서였다.

지금은 사거리 신호를 위반하게 되면 언제 어느 곳에서 블랙박스에 찍혀 신고 될지 모르는 살벌한 교통 환경으로 변모했다. 특히 교차로에 진입하는 우회전 차량은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를 포함해 신호와 상관없이 일시정지 뒤 출발해야 한다.

바뀐 우회전 방식에 따른 혼란을 줄이기 위해 1월 22일부터 사고다발 지역에 우회전 신호등이 별도 설치됐다. 우회전 전용 신호등은 보조 신호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신호로 어길 시 신호위반에 해당한다.

당연히 이를 신고하는 차파라치가 잠시 호황을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얼마 전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차선을 바꾸어 유텬하는 과정에 좌측 방향지시등을 늦게 켰다고 지나던 운전자가 블랙박스 사진으로 신고했다.

당연히 4만 원의 범칙금과 함께 사진이 담긴 고지서가 날아왔다. 일단 애매한 법규위반이라도 서로 신고하고 신고당한 사람이 보복심에서 다시 신고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렇게 파파라치가 성행하고 모든 업종에서 여차하면 신고 대상이 되어 과태료가 부과되며 신고한 자는 적절한 보상금을 챙기는 사회, 소위 당한 자는 피멍이 들지만 그래도 위반자라는 처지에 누구에게 말도 못 하는 상황, 과연 이 사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거미줄 같은 법망에 걸면 안 걸리는 게 없는 규제, 오죽하면 규제개혁의 필요성을 외치는 목소리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까. 물론 신고에 대한 순기능도 있지만 법을 정하기에 앞서 역기능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필요하다.

이대로 간다면 누구든 신고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앞으로 이 사회는 배려보다는 이기적 분위기가 팽배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와는 별개로 공익제보라는 게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언론이나 기타 사법부에 부패나 문제점을 제보하는 형태인데 이에 대한 신변보장이나 공정한 수사가 겸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쯤 되면 도덕불감증이 아니라 적반하장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오래 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을 떠나면서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예언한 말이 새삼 상기되는 건 섬뜩할 만큼 정확히 적중되고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정기를 말살했기 때문에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이 조선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고 큰소리 쳤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 적중하고 있다. 대안이 있을까. 어떤 법이든 현실에 맞게 충분히 검토하여 신중히 정하고 이를 국민정서에 합당한지를 다시 한번 살펴야 할 것이며, 법안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민초들을 염려하고 안배하는 배려가 겸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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