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가봉과 현상이 경고하는 미래
[덕암칼럼] 가봉과 현상이 경고하는 미래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3.16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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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이야기다. 학생이 교복을 맞추거나 사회에 진출해 양복을 맞출 때면 가장 먼저 줄자로 치수를 재고 계약서에 숫자를 기록하며 그다음 계약금을 건다.

여러 날이 지난 다음 평생에 한두 번이나 입을 양복을 보다 정확히 재서 입기 위해 가봉을 하는데, 가봉이란 양복 따위를 지을 때 몸에 제대로 맞는지를 보기 위하여 완전히 짓기 전에 듬성듬성하게 대강 꿰매어 맞추는 과정이다.

다 완성했다 싶어도 막상 입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아 다시 한번 수정하는 것이 구매자의 뿌듯함이나 재단사의 자부심이었다. 그때는 양복 뿐만아니라 와이셔츠도 그랬고 한복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치수별 디자인 유형별로 쏟아져 나올 때 많은 재단사나 양복점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도 고민도 하지 않았고 천년만년 해당 영역은 영구불변의 밥통인 줄만 알았었다.

설마는 현실이 되었고 지금은 아예 존재감조차 찾을 수 없는 직종이 되고 말았다. 같은 시기, 적어도 1998년 필자가 기자로 입문했을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키보드로 입력하고 글을 올리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는 미래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필름 카메라로 24장에 3장을 더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보너스였던 시절이었다. 현장을 촬영해도 사진관에 맡기면 몇 시간이나 지나야 현상을 마칠 수 있었고 봉투에 담긴 사진 중 잘못 찍히거나 신문에 적합하지 않은 사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앞에 전제한 가봉이나 현상은 수 천 가지 사라진 직종 중 2가지에 포함된다. 하루에도 수 백 가지 사라진 직종과 생성된 직종을 헤아리자면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미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자 한다.

이미 인터넷에 올라온 직종만 해도 헤아릴 수 없는데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업종을 살펴본다면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은 외관상 별 차이가 없더라도 내면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안 해도 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겠지만 못하는 것은 원상회복이 매우 어렵다. 가령 1차 산업이나 관련된 업종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샛말로 4차 산업은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하는데 이를 문명의 혜택으로 착각하며 편리주의에 젖어들어 인류 스스로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내주고 있는 점이다.

농사일도 과수원도, 야채를 키우거나 심지어 물고기 잡는 것조차도 최첨단 농기계나 어군 탐지기가 적용되어 수확량을 늘려가는 시대가 됐다. 인공지능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를 갖춘 수준으로 발달했다.

편리함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이동 수단이 변모하면서 생기는 온갖 호강(?)을 누리면서도 정작 운동 부족이나 환경오염, 각종 사고들의 단점에 대해서는 비교조차 하지 않았다. 인류는 얻은 것만 생각했었지 잃은 것에 대한 가치나 대체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풍습과 문화,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지며 누려야 할 소중한 혜택들에 대한 것들이다. 말이 좋아 함께 사는 사회이지 실제로 살벌할만큼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젖어 옆도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에 정착했다.

사회지도층은 일반 국민들을 성별, 지역별, 연령별, 종교, 이념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거둬들인 세금으로 분탕질하기 급급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상황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저출산이나 넘치는 일자리에도 일할 사람이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현실은 사람의 신념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상으로 일명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잘못 전달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자살을 부추기게 된다.

요약하자면 그 어렵던 시절에도 다산이 당연한 덕목이고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은 뭐가 그리 부족해서 온갖 불만에 분노에 대립만이 이어질까. 이제 10년 정도 지나면 저출산으로 인해 친척이라는 사회적 구성요소가 사라질 것이고 명절이나 결혼, 장례 문화가 달라질 것이며, 그렇게 사라진 우리 풍습과 문화의 가치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글자, 언어, 의식주까지 모두 우리 것에 대해 터부시하는 풍토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신탕으로 최후를 맞이했던 개도 서양 개가 들어와서 부모님 대신 안방을 차지하고 매운탕으로 희생되던 강가의 민물고기도 거실에 온갖 인테리어로 도배된 수족관에 서양 물고기를 키우는 시대가 됐다.

한 해 두 해 우리 것들은 그렇게 종적을 감추겠지만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정이 있어야 한다. 가령 일기예보가 그리 정확하지 않던 시절, 갑자기 비가 오면 우산이 필요한데 아버지가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 딸이 가방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달려오면 얼른 챙기게 된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에도 환한 미소와 반가운 표정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그러다 집에 도착할 무렵 딸은 비를 피했지만 아버지의 한쪽 어깨는 고스란히 젖어있다. 시간이 지나 늙은 아버지와 어쩌다 빗길이라도 걷다 보면 이번에는 중년이 된 딸의 한쪽 어깨가 젖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다.

우산을 기울여주다 한쪽이 젖는 배려는 부녀간의 아끼고 위하는 정이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렸는데 지금은 딸이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는 딸과 함께 찾아온 사위가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서양에서 검증이나 우리 민족에 맞는 옷인지 입어보고 들여와야 하는데 일단 지도층의 무분별한 도입이 낳은 기형적인 한민족의 추한 모습이다. 누가 누굴 탓하랴. 속인 자나 속는 자나 공범이다.

다만 길이 있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 이것은 아니다 싶은 부분은 공유하지 않는 것, 그런 사상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세상, 보다 사람다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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