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예측 가능한 미래 대안은 없을까 1
[덕암칼럼] 예측 가능한 미래 대안은 없을까 1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3.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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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언젠가부터 부모님이 계실 자리에 개가 앉았다. 부모님은 요양병원으로 보내고 다양한 종자의 개를 모시고 살며 온갖 정성을 다한다. 애견 인구가 천 만을 넘기면서 먹이고 입히고 아프면 병원에, 휴가 갈 때는 호텔에 모시고 돌아가시면(?) 장례식까지 성대하게 치러진다.

오죽하면 정승이 죽으면 문상이 없어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라고 했을까. 경우야 다르겠지만 개는 이미 오래전 인류와 근거리에서 동거해 왔고 이제는 반려견이라는 정중한 명칭까지 써야 한다.

그런데 예쁠 때는 마냥 가까이하다가 싫증이 나거나 애물단지가 되어 버려진 개를 유기견이라 한다. 하기야 부모도 요양병원에 갖다 버리는 인간들이 개라고 안 그럴까. 사람이 살다 보면 이리치고 저리치어 믿을 게 개밖에 없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모실 개라면 일시적인 감정보다 맡았으면 책임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갈수록 유기견의 숫자는 증가한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유기견이 발생하면 15일간 보호했다가 견주가 없거나 입양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안락사 처분하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다. 물론 계속 사육할 처지도 어렵겠지만 최근 언론에 보도된 고물상 주인의 동물학대사건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수천 마리의 개를 오랜 기간 돈벌이 수단으로 수집했다가 사료도 제대로 못 먹이고 사망하게 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어 형사처벌을 받은 바 있다. 문제는 개와 유사한 처분을 받는 사람에 대한 미래의 자화상이다.

지금의 개는 동물보호단체의 구조활동으로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고 사람도 정부의 복지정책으로 도움받을 수 있지만 향후에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어나서 피할 수 없는 게 수명의 한계인데 법적으로는 65세 이상이면 어르신으로 구분한다.

지금은 2023년, 그나마 노인이라는 계층에 속하면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대우라도 받고 아직은 요양병원에 파견할 간병인이라도 있어 대·소변이라도 받아내지만 이런 산술적 대안이 지속적일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점차 생산성 없는 노인이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온갖 눈치 다 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날이 온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어르신 대우는 당연하였다.

지금은 노인의 현주소가 열악하다. 하지만 30년 후에는 비경제인구로 분류돼 경제적 논리로 제몫을 하지 못하는 노인은 언제든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당사자가 어려우면 주변인이나 가족들의 성화로 살아서 괴로우니 죽어서 편한 삶을 선택하는 미래를 맞이할 것이며 그러한 사전 징조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요양병원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죽음으로 고통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던가. 인간의 삶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은 물론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 있음에도 막상 당사자가 되어보면 견디기 힘든 것이 삶의 연장선이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응어리를 풀고 떠나는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여지마저 없는 게 현재 대한민국 상당수 노인들의 현주소다. 무엇보다 치료에 드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야 하는데 의료비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독사다. 무연고 내지 유가족이 있어도 남긴 유산이 없으면 시신 인수도 아니하거니와 행정복지센터에서 지급하는 몇 푼의 장례비로 형식적인 화장만 치른 채 사라지게 된다.

물론 정치권은 사망해 표도 안 되는 일에 예산을 편성할 리 없지만 지금의 정치인은 사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것일까. 의술이 좋아지면서 환갑은 상 차리고 지인 초대하는 것 자체가 욕먹을 일이고 칠순이나 팔순 잔치 또한 그리 요란 떨 일이 아니니 향후 10년 정도 후에는 장례식장도 조문이라는 절차가 사라질 판이다.

대안을 제시한다. 이제 ‘웰다잉’이라는 죽음의 체험이 산 자들에게 사는 동안 정중하고 정성껏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필자 또한 웰다잉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많은 CEO들을 관 속으로 입장시켜 장송곡을 들려준 적이 많았다.

이제는 생전 장례식이 유행되어야 한다. 살아 생전 보고 싶은 지인과 미안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용서하지 못할만큼 미운 사람까지 모두 만나서 아름다운 이별의 정을 나누는 것이 장례문화의 새로운 장이 되어야 한다.

이미 사망한 사람을 조문하고 조화 보내고 부의금 봉투 나눈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둘이서 괴로우니 혼자서 외롭겠다는 이혼의 전성시대는 용기 있는 선택으로 여겨지고 있는 시대다. 이혼율은 OECD 국가 1위를 기록했고 경제적 이유, 성격이 안 맞아서, 기타 이유로 흩어진 가족단위의 구성원은 노년시대 외로운 독거노인의 전초단계다.

성냥갑 같은 시멘트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에 다닥다닥 갇혀 살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주거문화는 마당 한켠에 장독대가 있어서 고추장·된장 떠다가 저녁이면 가마솥 밥 짓고 국 끓이는 동안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과거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는 얻은 것만 누릴 줄 알았지 정작 잃은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갈수록 수도권 밀집현상은 지방을 소멸지역으로 몰고 갔으며 늘어나는 빈집은 이농현상에 따른 황폐화에 이렇다 할 대안이 없다.

빈곤의 악순환이 인구밀집 지역에서는 치열한 경쟁사회 분위기와 인간성 가치 상실의 현실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연적 현상에 따라 모이면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흩어지면 여유 있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음에도 천문학적 예산을 퍼부어 국토균형발전법을 정한 이래 정부의 주요기관까지 흩어 놓았지만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수도권 밀집현상은 유권자의 표가 수도권에 몰려있고 예산을 퍼 부을수록 수도권만 좋아지니 당연한 악순환인 것이다. 지방의 특색이나 장점은 알려지기도 전에 사라지고 닭들이 모이를 쫓아가듯 우르르 몰려드니 안 그래도 좁은 국토에 서로 뒤엉켜 양심이고 인간성이고 모두 뒷전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굴뚝의 연기나 정이 넘치는 가족들의 삶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인터넷이나 기계화에 맡겨버림으로써 정작 사람이 할 수 있는 여지까지 없애고 있다는 점이다. <예측 가능한 미래 대안은 없을까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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