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살아 생전 장례식
[덕암칼럼] 살아 생전 장례식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4.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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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사람의 삶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해서 ‘공수래 공수거’라 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장 기분 나쁜 말이 죽음인데 노령으로 갈수록 사망 확률이 높으니 더 조심스러운 단어다.

하지만 필자는 살아있는 사람의 장례식을 마련할 예정이다. 사망은 노화에 의한 자연사도 있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살아는 있지만 건강하지 못해 살아있어도 병원비나 약값을 치를 뿐 별다른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그중에는 정신적 불안, 불면, 우울증 등으로 일찌감치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한 행복수명은 50대 중반이면 종료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흐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살아 있지만 심장만 뛰는 기대수명 83세, 건강하다는 전제로 평균건강 수명 67세, 건강하지만 혼자 외롭게 살아서 행복하지 못한 행복수명은 58세에 그친다. 물론 개인의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대략적인 통계가 그러하단 뜻이다.

독자 여러분은 현재 몇 살이며 얼마나 더 살까. 살아있지만 건강한가. 그리고 행복한가. 필자가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가보면 망자는 영정사진만 있고 시신은 사체 보관실에 있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간 망자에게 조화가 수 백 개 진열된들 무슨 소용이며 부조금이 얼마나 들어온들 무슨 소용일까.

평소 살아 생전 밥 한끼 술 한잔 했으면 좋았을 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감히 아니라 할 수 없는 게 대한민국의 장례 문화다. 한국과 일본은 모든 흐름이 약 30년 정도 차이가 난다.

노래방, 미용이나 화장, 인구감소나 지방의 소멸현상, 고독사 등 모든 인간사의 풍토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일본보다 더 현실적이고 가능성 높은 장례사업을 계획한다면 독자들은 어떤 판단이 들까.

대안을 마련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이 사고로 한번에 운명을 달리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라도 죽음이 예견된다면 적어도 사망 한 두 달 전에 평소 만나야 할 친구, 친척, 미운이고운이 원수와 은혜로운 이까지 모두 초청해서 그 기한을 한 달 정도 둔다면 그래서 각자의 일정에 따라 만날 수 있는 날이 정해지고 때로는 한 두 사람 때로는 수 십명일지라도 살아 생전 장례식은 아름다운 이별이 되는 것이다.

미움을 용서하고 고마운 이에게 인사하고 일가친척 바쁘다고 못 본 사람 손도 잡고 사진도 찍고 마음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가는 것이 어떨까. 망자의 나이는 앞서 거론했듯 늙을 수도 젊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느 날 갑자기 저 세상 간다면 한참이나 지난 후에 안부를 묻는 결례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장례문화는 이제 개선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과거처럼 문상객들도 형식적인 절차에 따라 절 하고 밥 먹고 가는 것이 전부이고 그 조문조차 이제 점차 줄어들 것이며, 늘어나는 고독사를 보면 같은 사람일지라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고독사는 사회적 타살이나 마찬가지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처럼 비참한 게 없기 때문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인다. 주로 50대와 60대가 주를 이루는데 경제적 이유도 있겠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4배나 많다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오래 살 수는 있지만 일찍 퇴직하고 수 십 년 동안의 삶은 뚜렷한 목적이 없는 한 망망대해에 놓인 돛단배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그 이유 중에는 이혼율도 포함되는데 2011년과 2021년을 비교해 보면 30년 이상 된 부부들의 이혼율이 7%에서 17.6%로 늘어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우울감, 그리고 이어지는 소외감이 우울증으로 이어졌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질병에 가속도가 붙어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50대·60대의 살아 생전 장례식은 삶의 가치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비현실적인 장례문화를 개선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미국 CNN은 한국 중년 남성들의 고독사 문제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를 인용하면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물가상승으로 터무니 없이 높아진 생활비, 그리고 소득에 대한 불안정을 손꼽았다.

대부분 쪽방이나 반지하, 고시원을 전전하는 이들의 삶은 단순 노동시장으로 몰렸다가 그나마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밥그릇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버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정부가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워낙 막막하니 묵인하고 있는 것일까. 복지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의 삶은 사실상 경험과 연륜에 따른 노하우가 풍부하게 잠재돼 있다. 정부에서 형식적인 테마로 취업 지원이나 정신치료니 하지만 모두 전시행정에 불과한 것이고 이들의 삶이 한때 대한민국의 근대화에서 현대화로 이끈 주역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취지는 곧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뤄질 것이며 아름다운 이별에 대한 장례문화의 개선과 잠재적 가치를 퇴직자들의 새로운 인생설계에 청사진을 제시할 계획이다. 마치 솔개의 선택처럼 후반전을 꾸려갈 자신만의 피나는 거듭나기에 장을 마련하여 세대 차이에서 피할 수 없는 난이도를 해결해야 한다.

이미 스마트폰, 매장의 키오스크, 모든 일상을 앱이나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30·40세대와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며 이 같은 세대차이 극복은 훗날 20·30세대나 10·20세대가 성장했을 때 돈보다 사람, 기계보다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발전을 전제로 해야 한다. 동물보호법은 있어도 부모보호법은 없는 것이며 동물 학대했다가 구속되는 사례는 넘쳐도 노인 학대했다가 구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살아 생전 장례문화는 산 사람에 대한 책무이자 고독사에 대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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