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자식 모시고 부모 키우고
[덕암칼럼] 자식 모시고 부모 키우고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5.1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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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오늘은 사람이 아무 경험이나 지식도 없이 태어나 생물학적으로 한 마리 동물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글과 사회적응을 위해 필요한 각종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 그리고 스스로 자립할 시기인 성년의 날이 겸비된 날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군사부일체’라 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위치나 존재감이 하나라는 말인데 케케묵은 고려적 옛말일까. 아니면 지금도 많은 국민에게 적용되는 말일까. 당연히 전자겠지만 사람이 제 아무리 잘 나도 수 천 년 전해 내려오는 말은 모두 그만한 이유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고 스승의 길을 다짐하는 뜻에서 정한 매년 5월 15일은 이제 거의 그 뜻이 상실된 것이나 진배없다. 스승이라기 보다 교사, 교직원, 학원 강사, 방과후 교사, 과외선생 등으로 불리며 간혹 특별한 기술을 전수하거나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 무예나 도자기기술, 민요·창가 등을 가르쳐야만 들을 수 있는 단어로 전락했다.

오래전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화풀이나 성적 유린 대상이 되고 온갖 명분으로 선물이나 봉투가 나올때까지 부모들을 호출하는 등 교권 추락의 과정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정적 공간은 법적 공간으로 돌변했다. 어쩌다 학생들 간에 한바탕 싸움이 있어도 서로 운동장 한편의 수돗가에서 코피를 닦아 주면 다시 친해지지만, 반면 지금은 욕설만 해도 언어폭력으로 학원폭력위원회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르는 시대로 변했다.

교사도 어쩌다 훈육하려면 학생들의 영상제보나 학부모들의 항의를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추락한 교권은 학생들의 인권조례가 다시 윤리적 문제점이 두드러지면서 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일부 교사가 교권을 말아먹었듯 일부 학생이 인권조례의 참뜻을 퇴색시키고 있다. 이쯤하고 그렇게 가르친 학생들이 고교시절을 마칠 때 즈음이면 성인이 된다. 흔히 성인하면 육체적 성장이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유흥업소 출입이 가능한 나이로 기준한다.

편의점 담배를 사거나 술집을 드나들고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울 수도 있으며 이성 간에 성관계도 대놓고 할 수 있음을 기준으로 친다. 이러한 육체적 성장에 비해 정신적 성장이 병행된다면 더 없는 금상첨화다.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될때까지 아무런 사고나 질병 없이 얼마나 많은 비용과 행운과 노력이 병행되었던가.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은 물론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사회진출에 대한 꿈과 희망에 부풀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은 더 없이 뜻깊은 생일날인 것이다.

생일의 당사자, 부모와 친구나 선배 등 모든 주변인들이 축하하고 격려하며 어깨를 두드려 줄 수 있는 날이길 바란다. 말로 꿈틀대는 한류문화와 스포츠,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각자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성년이 된 차세대들에게 긍정의 힘을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낳은 정 못지않게 가르친 스승을 찾아뵙는 미풍양속이 1년에 한번쯤이라도 이어지길 고대해 본다. 이유인즉, 교사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사춘기와 거침없는 청소년시절 말 한마디로 힘이 되어 준 스승이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찾고 싶은 스승은 스승을 위함이 아니라 찾는 당사자에게 마음의 요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늙어서 어렵게 살더라도 주름진 손 한번 잡아드리고 얼마의 용돈이라도 전하면 당사자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생각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행복 찾기, 누구나 꼭 한번은 겪었을 성년의 날,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비결은 국가·단체나 특별한 기관에서 할 일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자만이 누리는 삶의 가치다.

사람은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겨우 설 때는 보행기가 필요하며 외출할 때는 유모차가 필요하다. 먹는 것은 이가 없으니 이유식이나 삼키기 좋은 음식이 전부다.

조금 더 커서 청소년 시절이 되면 대통령이나 외교관, 과학자가 꿈이지만 더 크면 공무원 말단직이라도 해보려고 시험을 치지만 현실의 벽은 갈수록 높아만 보인다.

때로는 실패도 해보고 그래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 40대가 지나면 하늘의 명을 받들어 산다는 지천명의 50, 세상 다 산 것 같아도 60고개를 넘어서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깨닫는다.

그러다 70이면 입은 닫고 지갑만 열어야 하는 것이고 다시 80이 되면 폐지를 줍기 위해 유모차가 필요하며 90이 되면 안방에서도 서 있기 힘들어 보행기가 필요하다. 그러다 조금 더 늙으면 대·소변을 못 가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아 때와 같은 위치가 된다.

너나 할것 없이 자식 모시는 것보다 부모 키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체험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며 도덕보다 법적 기준이 우선시 되는 현실이 개선되길 바란다. 자식을 모시는 것은 부모가 사는 삶의 가치이자 행복이지만 부모를 키우는 것은 자식으로서 또 다른 의미가 크다.

자식보다 부모의 대·소변이 덜 구린 걸 알게 되고 자식의 솜털 난 손보다 주름진 부모의 손이 덜 곱더라도 더 귀함을 알게 된다. 자식은 맛난 간식 사들고 가면 환호만 지르지만 부모는 씹기 쉬운 여문 음식 챙기면 그런 말도 못하고 빙그레 미소만 짓는다.

자식은 값비싼 유모차에 브랜드 의류를 입혀도 당연한 것이지만 부모는 낡은 유모차로 자식 몰래 폐지를 주워 몇 만 원이라도 모아 저가의 양말이라도 신세지지 않으려 한다. 때로는 1년에 한번 찾아줄지 말지 하더라도 경로당에 가면 자랑스런 자식이다.

옛 말에 ‘눈에 멀면 마음에 멀어진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은 혈육이고 가까기 있어야 정도 들고 말도 통한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자식을 모시고 부모를 키우던 천륜의 부덕함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모든 국민들이 부모를 모시는 나라로 변해갈 것이다.

그리하면 지구촌 많은 인종들이 대한민국의 효를 부러워할 것이고 그 대단한 미국도 아이·어른 할것 없이 모두 반말에 친구처럼 지내는데, 어찌 동방의 작은 나라는 도덕과 예의가 저리도 잘 갖춰줬는지 부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노력하거나 돈을 들여도 절대로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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