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선 수필] 능소화 꽃덤불에 떠오르는 얼굴
[특선 수필] 능소화 꽃덤불에 떠오르는 얼굴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07.1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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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7월 중순이 되니 능소화가 제철인 양 화사함을 뽐낸다. 능소화는 주황색 색상이 화려하고 오랫동안 계속 피어 여름 한철 내내 볼 수 있는 꽃이다. 능소화를 보면 떠오르는 문인 부부가 있다. 띠동갑으로 금실이 좋아 잉꼬부부로 소문났던 방기환 · 임옥인이 그 주인공이다.

방기환(方基煥, 1923년 1월 16∼1993년 1월 9일)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소설가 이종환(李鍾桓, 1920~1976)과 함께 고아원에서 생활하였다. 이종환은 1942년 만주일보에 단편소설 「낙엽의 노래」를 발표하고, 1947년에는 희곡 「여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는 1953년 서울신문 주간으로 활약하였으며, 1959년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을 맡았고 그 후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로 있었다. 1968년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방기환은 1944년 극단 <청춘좌(靑春座)>에서 현상공모한 희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48년 7월 아동잡지 <소년>(1950. 6월호 종간)을 창간하여 주재하며 장편 소년소설 「꽃 필 때까지」를 연재(1948~49)하며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소년소설을 쓰다가 나중에는 소설가로 변신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어우동』이 그의 대표 소설이다.

방기환이 연상의 띠동갑 임옥인(1911~1995)을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소년>지의 주간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함북 길주에서 태어난 임옥인은 일본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생여고보 교사, 원산 누씨(樓氏)여고보 교사로 있었다.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소설가로도 활동하던 그녀는 중앙문단에서 좀 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펴고 싶어 1946년 홀홀단신 월남하였다. 

임옥인은 1949년 <소년>지로부터 동화를 청탁 받아 <소년> 편집실을 찾아갔다. 26세의 주간 방기환이 38세의 중견작가 임옥인을 반갑게 맞았다. 임옥인은 젊고 발랄한 아동문학가 방기환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 무렵 연합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펴고 있던 임옥인은 그 이후 방기환을 여러 차례 만나 정담을 나누다가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6ㆍ25전쟁은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만다. 1·4후퇴 때 혼자 피란길에 오른 임옥인이 온갖 고생 끝에 심장병까지 얻어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병세가 깊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대구 피난지에 구세주로 나타난 사람이 방기환이었다. 방기환은 임옥인을 정성껏 보살펴 건강을 되찾게 했다. 환도 직후 이들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살림을 차렸다. 비록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즉흥적 동거가 아니라 법적 절차를 거친 정식부부였다.

하지만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꾸려나가는 생활 형편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구차하였다. 부부는 닥치는 대로 글을 썼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임옥인은 서너 개 잡지에 연재소설을 쓰고, 건국대학교에도 출강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50년대 말 <문학예술>에 연재한 임옥인의 장편소설 『월남전후』가 자유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이윽고 KBS라디오가 입체낭독으로 방송한 임옥인의 ‘당신과 나의 계절’이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자 그들의 생활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어느 날 영화제작자 한 사람이 찾아와 ‘당신과 나의 계절’을 영화화하겠다며 저작권료로 당시로서는 거금 10만원을 내놓고 갔다. 결국엔 영화화되지 못했으나 부부는 그 돈으로 둔촌동 92번지의 땅 1,000여 평을 사 두었다. 그들이 이 터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이사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서울 중심부에서는 아주 멀어 교통도 불편했으나 그들 부부에게는 무지개가 피는 낙원이었다. 넓은 터에 능소화를 비롯해 갯버들, 산벚나무, 소나무, 잣나무, 아카시아, 뽕나무, 싸리나무 등 1,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고, 한쪽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들어 문인들의 세미나나 토론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여름철이 되면 능소화가 만발하여 능소원으로 불렸다.

집도 없이 두 아들과 함께 떠돌던 고아원 시절의 친구 이종환을 불러들여 살게 했던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문인 셋이 살고 있으니 문단 친구들의 발길도 잦았다. 조연현· 김윤성· 유주현 같은 이들이었다. 이종환이 세상을 뜬 뒤 방기환은 헛헛한 마음에 조연현 등에게 땅을 떼어줄 테니 들어와서 집 짓고 함께 살자고 여러 차례 권유하기도 했으나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방기환은 늘 임옥인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타향 객지에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임옥인은 복막염, 폐결핵, 신장염, 맹장염 등을 앓았고, 수술을 받은 것만도 열한 차례였다. 1975년 임옥인이 다시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방기환은 흐느끼면서 ‘내 목숨에서 15년을 떼어 아내에게 얹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 기도가 통했는지 임옥인은 기적처럼 소생했다. 방기환은 1993년 70세를 일기로 보훈병원 병상에서 타계했고, 임옥인은 그보다 2년을 더 산 뒤 84세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중앙보훈병원 정문에서 선린초등학교를 지나면 오른편에 그들의 옛 집터가 있다.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두 작가가 사랑채로 사용했던 아담한 한옥 별채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이 보인다. 부부작가가 작품을 쓰며 살았던 이곳은 현재 아쉽게도 집터만 보존되어 있고 건물 내부는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부의 애환이 깃든 능소화는 아직도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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