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 - 언론탄압의 말로
장안문 - 언론탄압의 말로
  • 경인매일 webmaster@kmail.com
  • 승인 2006.07.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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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의 첫 언론 탄압을 꼽으라면 지금으로부터 3100여년 전의 은 왕조(朝)의 제후국인 위(衛 )나라 여(?)왕 때 폭정이다.

여왕은 무당을 불러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 밀고 하게 하여 가차 없이 처단 하였다. 그렇게 하자 여왕을 비방하는 자들이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여왕이 이에 고무되어 더욱 단속을 버리자 백성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다.

여왕은 당시 현자로 추앙을 받는 소공(召公)에게 말했다. “내가 비방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게 되어 편안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소공은“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하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피해가 배증되는 것과 같이 백성의 입을 막는 것도 위험하다. 따라서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길을 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언로를 열어 의사가 소통하게 해야 된다.백성들이 마음껏 말하게 하여야만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 비록 듣기 싫은 말이라도 귀를 열 으면 백성은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백성의 입을 막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나 여왕은 이 말을 한귀로 흘려보냈다. 정치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어 여왕은 편해졌으나 3년 후 백성들이 힘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백성들의 공격에 여왕의 편에 서는 자가 없었다. 여왕은 다른 나라로 피신했으나 난군에 잡혀 죽었다.

2300여년전 진시황(秦始皇)이 벌인 분서갱유는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불린다. 진시황은 당시의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하여 실제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왕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이에 만족치 않고 사상까지 통일시키려 했다.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관계 서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태워 버렸다. 이에 유생들이 반발하자 유생400여명이 생매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의 통일은커녕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도중하차하고 만다. 언론 탄압으로 국가를 통치하면 뒤끝이 좋지 않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아닐 수 없다.

하남시에서는 기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취재방해를 일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문사의 대표이자 주민의 대표로 나온 기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인을 대우는 못 해 줄 만정 문전박대를 해서야 되겠는가. 언론인 응대가 그럴진대 일반 민원인에게는 오죽 하겠는가. 고사가 아니더라도 언론을 막는 지자체는 성공하기 어렵다. /滿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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