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4·19 그날이 있었기에
[덕암칼럼]  4·19 그날이 있었기에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4.04.1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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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기록된 4·19혁명은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발발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규탄 시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1차 산업인 농업이 주를 이루고 있고 열심히 농사지어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으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굳이 민주화를 떠나 나는 못 배워도 내 자식만큼은 대학 보내 출세시키려는 교육열이 강했던 세대들의 한이 맺힌 시대였다.

그렇게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학교 보내놨더니 데모한다면 부모들의 걱정이 태산이었다. 지금처럼 서울에만 몰려 사는 형태가 아니라 서울 상경 자체가 어렵던 시절이라 서울로 유학 간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화에 대한 새로운 식견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의 국익에 맞춘 애국관을 갖게 했다.

당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평균 나이를 20세로 치자면 2024년 지금은 80세 노인이다. 이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지금 대한민국의 자유화를 태동시키는 첫 불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씨가 되고 거름이 되어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본 것이 2024년의 민주적인 총선과 선진화된 국민 의식, 표로 심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물론 그동안 군사독재와 다양한 정치변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호사를 누리는 현세대들은 과거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의 각종 집회 시위에 개인의 희생이 있었음을 함께 공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상류의 뾰족한 바위가 물살을 따라 깎이고 다듬어져 하류에는 둥근 조약돌과 모래톱으로 형성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2024년 총선을 맞이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정치세력이 여당인 국민의힘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의식의 수준에 따라 4%대의 표차이지만 2:1의 의석수로 나타난 것이 그 예라 할 것이다.

야당을 선택하지 않은 절반의 유권자들이 여소야대의 22대 국회에 대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까. 이는 지방선거에서 다시 반등할 소지가 크다. 이번 총선에서 한동훈 위원장은 처음보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을 나타냈다. 이미 대패를 짐작한 듯한 발언도 수시로 공개됐다.

개표 결과 예상을 벗어나지 못 한채 억울함을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의료대란을 왜 미리부터 터트렸냐는 지적도 잇따랐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안산갑 양문석 후보에 대한 강한 감싸기가 오히려 역풍이었다는 여론이 불거졌다.

승패와 무관하게 원인을 찾는 하소연과 넋두리가 분분했다. 어쨌거나 결과는 나왔고 선거에 대한 후폭풍은 잠잠해졌다. 다행히 64년 전 불었던 부정선거의 태풍은 재현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온갖 가짜뉴스와 허위 영상이 나돌면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재검표까지 거론되었지만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제 구두끈을 고쳐 매고 여야를 넘어 말로만 떠들던 민생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오늘 만큼은 4·19 64년 전 그날에 어떤 일이 동기가 되었으며 마무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지금처럼 공무원의 중립은 없었다. 오히려 공무원들이 대통령 선거에 동원되어 개표 조작에 앞장섰던 시절이었다. 야당의 유력한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하고 정적이 없는 상황에서 투표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런 와중에도 야당 선거 관련자들은 계속해서 체포됐고 탄압을 받았으며 여당의 하수인들이었던 반공청년단의 폭력 단원들이 조직적으로 감시하고 심지어 폭력도 행사했다. 경찰도 대놓고 여당 후보를 지지하며 보호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요즘 같았으면 SNS에 난리가 날 일이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부통령에서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당선됐다.

국회에서는 불법 선거에 대한 무효를 주장하면서 일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공분이 불붙은 들판의 바람처럼 몰아쳤다.

시초는 경남 마산에서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채 버려진 16살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 발견에서 시작되었지만 과정과 결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라며 일부 무분별한 사람들의 난동으로 치부했다.

인정하면 부정선거 결과를 토해놔야 하고 부정하면 일이 커질 판이었다. 격동의 시대 대한민국은 그렇게 홍역을 치르며 성장해 왔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사태를 수습한 게 아니라 더 악화시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다음날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찰과 전면전을 벌였고 그렇게 4·19혁명은 대한민국 전역으로 민주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희생을 담보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처럼 이름만 다르지 탄핵이라는 하야를 선택해야 했다. 권력은 사라졌지만 권력의 그늘에서 잘 먹고 누리던 사람들의 행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역대 대통령이 총을 맞고 사망하거나 공분의 총대를 메고 교도소에 들어가거나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해도 병풍 뒤에서 미소를 지으며 잘사는 사람들은 다 잘 산다.

민주화의 심지에 불이 붙던 그날 1960년 12월 18일생인 윤석열 대통령과 1964년 12월 22일생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