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현장 속에서
역사 현장 속에서
  • 수원대 명예교수 이 달 순 kmaeil@
  • 승인 2007.09.2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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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국해병 제1사단과 국군해병대는 9월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해병대의 뒤를 따라 진격한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시흥,안양,과천등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끼고 돌아 서빙고와 뚝섬 맞은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9월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가로를 인민군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병기사단의 선발대는 9월26일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전세는 이제 북진만이 남았다. 9월25일 이른 아침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32보병연대는 신사리 일대에서 도하를 개시했다. 돌격부대인 미 제2대대는 04:30시 집결지인 사당리에서 LTV 비행기에 올랐다. 제1파의 8대대는 06:30 짙은 안개 속에서 공격 개시선을 넘어 한강을 건넜다. 서빙고쪽의 모래사장에 올라선 미 제2대대는 곧장 남산으로 올라가 오후3시쯤 정상을 장악하였다. 26일과 27일의 이틀 동안 한?미해병대는 원효로, 서울역, 만리재, 북아현, 북악산 세검정일대에 북한인민군의 산발적이면서도 격력한 저항을 받아 어려운 싸움을 거듭하면서 도심의 광화문과 중앙청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한국 해병대는 주로 미 해병연대의 예비대로서 남아있는 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일을 맡았으나 한국 해병대들은 무섭게 돌격하였다. 27일 새벽 한국 해병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려 세웠다. 한국해병대는 1949년 한국해군 예하부대의 해병대로 발족하였는데 다음해 최초로 통영 단독상륙작전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리게 되자 수차에 걸쳐 군을 증원편성하고 고된 훈련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상륙작전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리면서 서울탈환과 중앙청광장에 태극기를 올리면서 일약 한국해병대는 세계적인 군대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 한편 밤에는 섬광이 번득이고 박격포탄의 폭음과 포탄이 머리위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마루에다 테이블을 늘어놓고 솜이불을 그 위에 올려놓고 포탄이 떨어지면 테이블 밑에 숨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탄에 의한 것인지 방화인지 독립문 근방에 있는 주택가에서 불이 일어나 언덕위의 우리 동리로 옮겨오고 있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초가지붕이 위험하여 그 집을 넘어뜨려야 한다고 해서 나는 기둥을 잘랐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 지붕과 처마 밑에 물을 잔뜩 뿌렸다. 다행히 불은 언덕 밑에서 멈추게 되었다.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다. 이날 15시가 조금 지나서 미 제5해병연대 G중대는 전차를 앞세워 중앙청을 확보했다. 미 제5해방연대는 창경원까지 나간 다음 미 제7해병연대에게 돌격의무를 넘겨주고 해병사단의 예비로 되어 후방에 집결했다. 28일 미 제1및 제7해병연대는 서울 시가에 남아 있을 소규모의 인민군들을 무시한 채 서울에서 의정부로 빠지는 길목을 굽어보는 서울 동북쪽의 고지들을 향해 밀고 나아갔다. 서울탈환식이 거행된 9월29일 미 해병사단은 서울 주요지역의 경비책임을 실질적으로 미 제5해병연대에 맡기면서 미 해병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수도 서울을 되찾은 다음 한국해병대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북진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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